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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Apr 23. 2024

C1.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여정

  - 아녜스 바르다 & JR,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C1.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여정 - 아녜스 바르다 & JR,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2017)

사실과 진실, 브레송과 고다르

   다큐멘터리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은 극영화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태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모든 영화는 기본적으로 편집 과정을 거치기 때문이고, 또 모든 영화에는 카메라의 시점 또는 위치를 결정하고 피사체를 선택하는 감독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진실이겠지요. 그러니까 이 영화도 우리는 사실보다는 진실이 무엇인가를 찾는 눈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이 영화의 카메라가 시종일관 평범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듯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장면은 역시 노년의 영화감독 아녜스 바르다와 젊은 사진가 JR이 함께, 같은 사진가인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무덤과, 같은 영화감독인 장 뤽 고다르의 집을 찾아가는 장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들은 브레송도 고다르도 만나지 못합니다. 브레송은 이미 세상을 떠난 고인이었습니다. 고다르는 아직 살아 있지만 만나주지 않습니다. 또는, 그들과의 만남을 회피합니다.(고다르는 지지난해, 그러니까 이 영화가 나오고 5년 뒤인 2022년에 9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요.)

   고다르의 집 잠긴 문 앞에서 바르다는 그걸 못내 섭섭해하면서도 눈물을 머금고 돌아섭니다. 어쩌겠습니까. 예술가의 뜻은 아무리 존중해 주어도 부족할 테니까요. 무엇보다도 바르다 자신이 예술가 아니겠습니까.


바르다는 아름답다

   소설이나 극영화처럼 스토리의 기승전결이 있는 다큐멘터리는 미덥지 않습니다. 그런 다큐멘터리일수록 관객의 기대에 영합하는 상투적인 결말, 극영화스러운 마무리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왠지 진짜가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거지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 독특한 것은 뭔가를 향해서 가는 것처럼 보이기는 하는데, 어디에 도달해도 상관없다는 홀가분함, 그런 매우 자유로운 정서로 가득하다는 점 때문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여기서 바르다는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 편의 수필을 쓰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어떤 의도 없이 붓 가는 대로 쓰는 글―. 꼭 노자(老子), 장자(莊子)의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바르다는 이제 거의 일체의 얽매임에서 해방된 어떤 현인(賢人)의 경지에 올라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래서인지, 이 영화에 나오는 다른 어떤 얼굴보다도 바르다의 얼굴이 가장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얼굴들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은 다소 무미건조하고 심플하게 〈Faces Places〉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사랑한’이라는 말을 넣어서 정서적으로 울림이 큰 제목이 되었습니다. 이게 바르다의 본뜻과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한 얼굴들’이라고 하면 어쩐지 ‘사랑할 만한 얼굴들’을 선택했다는 뜻으로 들려서 약간 차별적인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물론 영화는 제한된 상영시간이라는 조건이 있으니까, 취사선택의 과정이 분명히 있기는 할 테지만요. 이 점과 관련해서 바르다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대사가 있습니다. 바르다는 말합니다. “멋진 사람들을 우연히 만나는 게 난 좋았어. 우연은 항상 최고의 조력자였거든.” 사진을 찍는 것도 결국은 이런 우연의 행운에 기대어서 하는 작업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바르다가 우연의 도움으로 만난 멋진 사람들의 얼굴을 흑백으로 커다랗게 프린트하여 때로는 홀로, 때로는 군집으로, 그들 삶의 터전(주로 집이나 직장의 외벽인데, 더러는 해변의 구조물이나 컨테이너이기도 합니다)에 부착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멋진 사람인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바르다는 말합니다. “얼굴마다 사연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제 기억에 인상 깊게 남은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퇴직을 하루 앞둔 노동자 사내가 바르다와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사내가 말합니다. “오늘이 제 마지막 날입니다. 조기퇴직을 하거든요. 지금 절벽 앞에 선 기분입니다. 오늘 저녁에 뛰어내리겠죠. 문득 집에 있는 저를 발견하겠죠.” 이어 바르다가 은퇴하면 뭐 할 거냐고 묻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은퇴는 처음이라서요. 제 앞은 텅 비어 있죠.” 이때 카메라는 말을 끝낸 이 노동자 사내의 얼굴을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5초 정도 롱테이크로 가만히 바라봅니다. 뭔가 사내에 대하여 예의를 차리는 듯한, 사내를 존중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장면이어서 잊히지가 않습니다.

   특기할 만한 것은 항만노동자들의 경우입니다. 이번에 바르다는 그 당사자들이 아니라, 그 아내들을 선택합니다. 같은 여성으로서 바르다 감독의 마음 자락을 느끼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왜 그들을 선택했느냐는 물음에 바르다는 이렇게 답합니다. “항만노동자 아내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려고요.” 작업장이나 파업의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들끓을 때 그 노동자들의 뒤에 있는 가족의 목소리는 듣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바르다가 이 점을 놓칠 턱이 없지요.

   한데, 바르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냥 아내 혹은 여성이 아니라, 직장을 가진 한 사람의 일하는 사람으로 그들 각각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컨테이너에 부착된 자기 사진의 심장 부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요. 이 시각적 강렬함과 도저함, 그리고 자신감이 얼마나 통쾌한지 모르겠습니다.     


사진의 기능과 바르다의 의도

   이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제가 계속 생각했던 것은 사진의 기능에 대해서입니다.

   이 영화에서 바르다의 선택을 받아 자기 사진이 커다랗게 프린트되어 어딘가에 부착되는 사람들은 결코 아름답거나 멋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냥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지요. 그들은 결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도, 특별한 사건을 겪은 사람도, 특별한 일을 해낸 사람도, 무엇보다도 특별한 외모를 지닌 사람도 아닙니다.

   한데, 그들이 바르다의 선택을 받아 JR의, 또는 바르다의 카메라로 촬영되고, 마침내 커다란 흑백 사진으로 프린트되어 벽면에 부착되면, 그들은 어느새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아름답고 멋진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 스스로가 자기 사진을 보고 감동하는 것이 그 움직일 수 없는 증거입니다. 대개 사람들은 자기 사진을 보고 얼마간 못마땅하게 여기기 마련 아닙니까.

   이쯤에서 JR이 끌고 다니는 트럭에 붙어 있는 ‘Inside Out Project’라는 슬로건을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말 그대로 내면을 밖으로 끄집어낸다는 뜻 아닙니까. 그러니까 여기서 바르다와 JR이 사람들의 얼굴 사진을 찍는 것은 그들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그들만의 목소리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진정성 덩어리인 그들의 진짜 내면이 밖으로 드러난다면 그 누가 아름답고 멋지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카메라는 겉모습을 찍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사진에서 드러나는 것은 내면이라는 이야기지요. 평생 영화감독으로서 영화를 찍어온 바르다는 노년에 이르러 마침내 보통의 사람들, 평범한 생활인들에게 평생토록 각자의 가슴속에만 간직해 온 진짜 내면을 드러내 보일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아주 시각적인 방법인 영화와 사진으로요.     


죽음마지막엔딩

   하지만 바르다는 예술가입니다. 무엇보다도 영화감독입니다. 그래서 바르다는 어떤 계기만 있으면 영화 또는 영화감독을 자기 기억에서 소환합니다.

   안과에서 눈 치료를 받을 때 바르다는 루이스 부뉴엘의 〈안달루시아의 개〉(1928)를 언급하지요. 심지어 거기에 나오는, 저 면도칼로 눈동자를 베어내는 충격적인 유명한 장면을 삽입화면으로 보여주기까지 하면서 그것과 자신의 눈 치료 장면을 애써 연결합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묘지를 찾아갔을 때는 그 옆에 나란히 묻혀 있는 또 다른 사진가 마르틴 프랭크를 ‘좋은 사진작가’라고 평가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의 맨 마지막이 바르다와 JR이 장 뤽 고다르의 집에 미리 약속하고 찾아갔는데도 결국 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장면인 것은 참 의미심장하지 않습니까.

   브레송의 묘지에서 JR이 바르다에게 느닷없이 묻습니다. “죽음이 두려우세요?” 바르다는 이렇게 답합니다. “두렵진 않은 거 같아. 마지막 순간인데, 난 기다려지기까지 해.” “왜요?” “다 끝날 테니까.” 그렇습니다. 삶처럼 영화도 시작했으면 끝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르다의 다음과 같은 말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습니다. “누구를 만날 때마다 그게 늘 마지막 같아.” 어쩌면 바르다의 이런 마음을 헤아렸기에 고다르는 영화 동료와의 그 오랜만의 만남을 굳이, 기어이, 한사코 피했던 것이 아닐까요. 마지막을 유예하는 의미로요.

   누구나 마음에 쏙 드는 영화를 볼 때면 그 영화가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아마 영화감독들도 모두 영원히 끝나지 않는 영화를 만들고 싶은 소망이 있지 않을까요.

   이 영화에는 바르다와 JR이 벤치에 나란히 앉아 있는 뒷모습을 찍은 장면들이 곳곳에 나옵니다. 엔딩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저는 문득 어쩌면 바르다는 이 영화를 통해서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만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은, 동시에 진정으로 자기 내면을 이해받고 싶은 한 늙은 영화감독―. 예술가를 같은 예술가 말고 누가 진정으로 이해해 줄 수 있겠습니까. 평범한 사람들의 얼굴 사진을 찍으면서 바르다는 한편으로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해 줄 동료 예술가들의 발자취를 더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아마 바로 그 점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바르다는 고다르 집의 잠긴 문 앞에서 못내 눈물지었던 것이 아닐까요. 이 영화를 바르다 감독의 자기 내면을 향한 여정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면,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바로 이 여정 자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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