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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Apr 27. 2024

C2. 눈높이의 미학과 심부름의 심리학

  - 윤가은, 〈콩나물〉(2013)

C2. 눈높이의 미학과 심부름의 심리학 - 윤가은, 〈콩나물〉(2013)

눈높이의 마법

   이 짧은 영화에서 가장 먼저 제 눈길을 끈 것은, 또는 제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카메라의 높이, 곧 시선의 높이입니다.

   콩나물을 사기 위해 시장을 찾아가는 이 어린 소녀(김수안)의 눈높이를 처음부터 끝까지 고집스러우리만큼 철저하게 지켜내는 카메라는 관객인 저를 이 소녀의 눈높이에서 모든 것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느끼게 만듭니다.

   하여 소녀의 언행과 마음에서 관객인 제가 어떤 느낌을 받아 비로소 소녀에게 감정이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소녀의 마음에 관객인 저의 마음이 얹혀서 아주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된 상태로 계속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이지요. 흡사 마법에 사로잡힌 것처럼, 또는 최면에 걸린 것처럼요.

   그러니까 저는 이 영화의 러닝 타임 동안 스스로 한 명의 소녀가 되어 세상을 경험해 보는 셈입니다. 이 또한 카메라만의 놀라운 힘 아닐까요.     


카메라의 높이 또는 시선

   카메라의 높이나 시선과 관련해서라면, 저는 이른바 ‘다다미 쇼트’로 유명한 일본의 오즈 야스지로 감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의 〈동경 이야기〉(1953)와 〈만춘〉(1949)을 처음 보았을 때의 정서적 감동과 미학적 충격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굳이 ‘인간 존중의 앵글’이라는 영화학 쪽의 다소 ‘비학술적인’ 설명에 기대지 않더라도, 카메라가 모든 인물을 나지막한 위치에서 살짝 올려다봄으로써 관객으로서 제가 그의 영화 속 등장인물들 모두가 다 무시당하지 않고 존중받는다는 따스한 느낌에 젖어드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그의 영화 이후, 처음부터 카메라의 눈높이 자체로 영화 속 등장인물들을 바라보는 관객인 저의 시각 체험에 이토록 큰 감각적인, 또는 정서적인 충격을 준 영화는 〈콩나물〉이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은 정도입니다.

   덕분에,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고, 가이드를 해주지도 않았지만, 저는 관객의 처지로 자연스럽게 소녀의 눈높이로, 곧 소녀의 마음으로 어른들의 무심한 대화를 듣고, 소녀를 무시하는 그들의 태도에서 마음의 상처를 받고, 아이들 세계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질투와 불편한 감정의 소용돌이에 여지없이 빠져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나를 보호해 주고, 배려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낯선 공간에서 여러 가지 다양한 빛깔의 낯선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드라마틱한 사건이나 사고가 벌어지지 않아도 긴장으로 오그라든 소녀의 딱한 마음이 관객인 저한테 그대로 전해져 옴으로써 저는 화면에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가 없었지요.     


심부름의 실제(實際)

   여러분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세대가 세대다 보니, 저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심부름을 했던 기억이 제법 많습니다. 집에 냉장고가 없었던 그 시절에는 어느 집이나 대개는 그날 장을 봐서 그날 해 먹고살았지요. 그래서 학교 다녀와서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면 어머니는 얼마간의 돈을 제 손에 쥐어주시며 시장에 가서 두부, 콩나물, 자반고등어 따위를 사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곤 하셨습니다.

   처음에는 서툴러서 몇 차례 낭패스러운 실수도 저질렀지만, 이내 저는 익숙하게 아주 경제적인 동선으로 이동하여 최단 시간 안에 한눈팔지 않고 그 심부름을 완수했고, 거스름돈도 학교에서 배운 산수 실력으로 정확하게 계산하고, 어김없이 받아 챙겨서 집으로 돌아올 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 속 어린 소녀도 엄마의 심부름에 응하여 콩나물을 사 오려고 홀로 시장을 찾아 나섭니다.

   한데, 소녀는 시장이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짐작컨대, 소녀는 아직까지 한 번도 제대로 심부름을 해본 경험이 없는 게 틀림없습니다. 더욱이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대놓고 심부름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어머니는 앞서 함께 제사상을 준비하던 동서들한테 이 소녀가 너무 어려서 아직 심부름을 할 만하지 않다고 분명히 강조해서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아마도 소녀는 스스로 길을 나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신이 비록 어리지만, 충분히 심부름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이려는 소녀다운 당차고 기특한 생각에서요.

   하지만 소녀는 결국 콩나물을 사 오지 못합니다. 여러 가지 방해 요소들이 소녀의 발목을 붙잡거든요. 어느 순간에는 소녀 스스로가 여기저기 한눈을 팔기도 하고, 급기야는 무엇을 사려고 했는지조차 소녀는 스스로 잊어버리고 맙니다.

   물론 이런 경험은 아직 심부름에 익숙해지기 전의 저한테도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심부름도 여러 차례 거듭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실수를 저지르는 경험을 통하여 차츰 능숙해지는 것이니까요.

   길을 물어도 친절하게 답해주지 않는 어른들, 다른 동네의 낯선 아이들이 부리는 텃세와 그 아이들한테서 이유 없이 받는 푸대접, 느닷없이 나타나 길을 가로막고 위협적으로 짖어대는 주인 없는 개, 복잡한 미로처럼 얽히고설킨 골목에서 문득 길을 잃는 낭패스러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도 못했는데 어느덧 해가 져서 어둑어둑해질 때의 공포와 불안…….

   이제 소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해바라기

   이 곤혹스러운 국면을 감독은 마지막 순간 그날 집안 제사의 대상이자 소녀의 할아버지인 고인(故人)을 등장시켜 소녀를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약간의 판타지스러운 설정으로 해결합니다.

   하지만 이 설정은 감독이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불가피하게 선택한 궁여지책이라기보다는 우리의 전통적인 가족애의 정서에 잘 맞는 매우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느껴집니다.

   이 지점에서 〈콩나물〉은 비슷한 소재를 다룬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와 다른 길을 갑니다. 이게 참 마음에 듭니다. 우리가 제사를 지내거나 추도식을 하는 것은 고인을 추모하려는 뜻이 그 기본 바탕이겠지만, 후손으로서 고인의 음덕(蔭德)을 입고자 하는, 소박하면서도 간절한 마음, 그 소망의 발로이기도 한 것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장면에서 제사상 위에 놓인 사진 속 고인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의 감동이 공포스럽거나 기괴하거나 엽기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가슴 한 귀퉁이가 따뜻하게 데워지는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은, 모르긴 몰라도 그 감동이 위에서 말한 우리 고유의 정서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다행스럽습니까. 장차 소녀는 아마 넉넉하지 않은 가정 형편에서도 잘 성장하여 한 사람의 어엿한 어른이 되지 않을까요. 소녀가 콩나물 대신으로 구해와서 제사상 위에 놓아둔, 고인이 생전에 좋아하셨다는 그 해바라기가 무슨 희망의 상징처럼 이런 기대와 전망, 그리고 소망을 제 가슴속에 모락모락 피워 올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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