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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수 May 24. 2024

C6. 얘들아, 자신만의 색깔을 찾으렴

  - 코지마 마사유키, 〈피아노의 숲〉(2007)

C6. 얘들아, 자신만의 색깔을 찾으렴 - 코지마 마사유키, 〈피아노의 숲〉(2007)

재능이라는 테마

   음악 영화의 주요 테마 가운데 하나가 라이벌끼리의 경쟁 구도를 바탕으로 한 ‘재능’임은 일정 부분 어쩔 수 없는 현상인 것 같습니다.

   스포츠를 제외한다면, 예술가 또는 예술가 지망생들이 갈고닦은 서로의 기예를 겨루는 이야기가 가장 드라마틱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경우는 아무래도 미술이나 문학보다는 역시 음악 쪽이지 않을까요.

   얼른 떠오르는 것은 주걸륜이 멋진 피아노 연주 솜씨를 뽐냈던 〈말할 수 없는 비밀〉(2015)의 ‘피아노 배틀’ 장면입니다. 다른 예술 분야에는 없는 ‘콩쿠르’라는 것이 왜 유독 음악에만 있는지, 그 까닭을 알 수 있게 하는 장면이었지요.

   아닌 게 아니라, 이 피아노 배틀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분명히 추상적인 개념의 예술 분야지만, 적어도 음악에서만큼은, 특히 연주에서만큼은 기예나 재능의 수준을 판별하는 데 어느 정도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연주가 아닌 작곡 능력의 편차를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성격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밀로스 포먼의 〈아마데우스〉(1985)는 아마도 ‘재능’이라는 테마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피터 셰퍼의 원작 희곡이 안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도 있겠지만, 너무 밀어붙이다 보니 역사적인 사실의 왜곡까지도 불사했다는 혐의가 있기는 하지요.

   그러나 〈아마데우스〉 속의 모차르트(톰 헐스)와 살리에리(F. 머레이 에이브러햄)는 천재와 수재(편의상 견주어 쓰기는 해도 썩 적확하다는 느낌이 드는 말들은 아닙니다)의 차이를 더없이 극명하게 구현해 보인 유례없는 캐릭터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연히 이때 천재는 모차르트고, 수재는 살리에리지요.

   하지만 이것은 천재는 선이고, 수재는 악이라는 식의 이분법을 적용한 결과라서 별로 마음에 드는 구분법은 아닙니다. 아닌 게 아니라, 재능 있는 예술가가 자기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지닌 다른 예술가를 시기하여 질투의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현상 아니겠습니까.

   요컨대 그 질투라는 감정 자체만을 두고, 그 감정의 소유자를 나쁘다고 몰아붙일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비록 부정적인 감정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런 감정 자체가 얼마든지 그 당사자를 더욱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도 있을 터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역전도 일어나는 것이 사실이지 않습니까. 게으른 천재보다는 부지런한 수재가 더 나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물론 모차르트의 경우는 ‘부지런한’ 천재 쪽이었기 때문에 역시 그에 못잖게 ‘부지런한’ 수재였던 살리에리가 끝내 따라잡지 못한 셈이지만요. 그런 모차르트의 부지런함을 두고 예전의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2008)의 강마에(김명민)는 ‘죽을 동 살 동’이라고 표현한 바 있지요. 그토록 천재였던 모차르트도 죽을 만큼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작곡했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이 질투의 감정을 빌미 삼아 살리에리를 무턱대고 빌런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태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예술 분야에서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지닌 사람에 대한 시기나 질투의 감정은 스스로 어떻게 그걸 다스리고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건전한 스트레스로 바뀔 수 있고, 나아가 발전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많은 음악가가 바로 이 건전한 스트레스의 힘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 부정하기 힘든 현실 아닐까요. 이 점에서 〈피아노의 숲〉은 〈아마데우스〉보다 훨씬 더 성숙한 시각을 보여주는 영화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선의의 경쟁과 적대적 경쟁

   ‘세상에 선의의 경쟁은 없고, 오로지 적대적인 경쟁이 있을 뿐이다.’

   이 명제는 어느 만큼은 참이고, 어느 만큼은 거짓입니다. 선의의 경쟁도 있을 수 있고, 적대적 경쟁도 있을 수 있습니다. 혹은 선의의 경쟁이 가능한 만큼 적대적 경쟁도 있을 수 있고, 적대적 경쟁이 있을 수 있는 만큼 선의의 경쟁도 가능합니다. 어쩌면 선의의 경쟁과 적대적 경쟁은 한데 섞여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연아 선수가 피겨 스케이팅에서 당당히 세계를 제패하기 훨씬 전에 같은 피겨 스케이팅 선수인 토냐 하딩이 경쟁자인 낸시 캐리건을 상대로 청부폭력을 저질렀던 사건이 있었지요? 그것이 아마도 적대적 경쟁의 가장 극단적인 사례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들의 문제적인 경쟁을 소재로 만든 영화가 바로 크레이그 길레스피의 〈아이, 토냐〉(2017)지요. 이런 차원에서 굳이 구분한다면 〈아마데우스〉는 적대적 경쟁의 사례로, 〈피아노의 숲〉은 선의의 경쟁의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우선 〈아마데우스〉에서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서로 경쟁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적어도 재능에서는 그렇습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자필 악보를 처음 보는 순간 대번에 그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건 상대가 안 되는 게임이다. 나는 모차르트의 적수가 못된다.’

   이것이 살리에리의 생각이요 결론이었습니다. 그는 ‘수재답게’ ‘천재’를 한눈에 알아본 것입니다. 그러니 모차르트와 살리에리는 서로 경쟁하는 사이가 아니며, 그렇게 될 수도 없습니다. 적어도 재능의 차원에서는 분명히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시기와 질투의 감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그 순간부터 돌올해지는 것은 오직 천재 모차르트에 대한 수재 살리에리 자신의 시기와 질투뿐입니다. 엄밀히 규정하자면,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와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모차르트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매개로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이지만요.

   그도 그럴 것이, 시기와 질투의 대상인 모차르트의 내면에는 살리에리와 관련한 아무런 경쟁 구도도 세워지지 않습니다. 살리에리는 애초 모차르트에 걸맞은 상대가 못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실상입니다.

   〈피아노의 숲〉은 분명한 경쟁의 구도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빚어나가지만, 이는 적대적 경쟁이라기보다는 아무래도 역시 선의의 경쟁 쪽입니다.     


진정한 경쟁자는 자기 자신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의 진짜 경쟁자는 기실 모차르트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듯이, 〈피아노의 숲〉에서도 아이들한테 진정한 경쟁자는 결국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이 교훈을 알려주는 〈피아노의 숲〉의 방식이 아주 섬세하고 매력적입니다.

   교훈이라면 꽤나 상투적인 교훈이지만, 저는 이 교훈이 썩 마음에 듭니다. 아니, 어쩌면 이 상투적인 교훈을 이 어린 초등학생 피아니스트들, 또는 피아니스트 지망생들이 이러저러한 경험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아 가는 과정이 참 마음에 든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아이들이 이 교훈을 통하여 마침내 음악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또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애니메이션의 테마 중의 테마, 가장 핵심적인 테마가 바로 이것입니다.

   〈피아노의 숲〉에서 카이는 천재고, 슈헤이는 수재입니다. 그래서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가 ‘수재답게’ 모차르트가 ‘천재’임을 금세 알아보았던 것처럼, 〈피아노의 숲〉의 슈헤이 또한 ‘수재답게’ 카이가 ‘천재’임을 단박에 알아봅니다. 그리고 자신은 도저히 카이의 적수가 못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 그 사실을 마음속 깊이, 진심으로 인정합니다.

   여기까지는 살리에리도 해낸 일입니다. 하지만 살리에리가 못해낸 일, 곧 이 인정을 실천하는 일을 슈헤이는 해냅니다. 여기서부터 〈아마데우스〉의 살리에리와 〈피아노의 숲〉의 슈헤이는 서로 다른 길을 갑니다. 적대적인 경쟁으로 가는 길과 선의의 경쟁으로 가는 길이 이 지점에서 결정적으로 갈립니다.

   이제 바야흐로 이 글을 쓰는 제 본심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슈헤이를 칭찬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똑같은 의미에서 살리에리를 제가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살리에리에 대한 비난과 슈헤이에 대한 칭찬이 서로 대응 관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살리에리를 비난하지 않으며, 다만 이해할 뿐입니다. 하지만 슈헤이는 분명히 칭찬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몇 가지 다른 사례들

   이쯤에서 몇 가지 다른 사례들을 들어볼까요.

   우선, 하기우다 고지의 〈신동〉(2007)이 떠오릅니다. 이 영화가 독특했던 것은 역시 천재와 수재의 구도로 이야기를 이끌어가지만, 이 경우는 ‘열정이 모자란’ 천재와 ‘열정이 넘치는’ 수재라는 구도였습니다. 듣기만 해도 흥미롭지 않습니까.

   하지만 〈신동〉은 토끼와 거북이의 이야기처럼 결과적으로 부지런한 수재가 게으른 천재를 이기는 따위의 시시껄렁한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신동〉은 넘치는 열정의 소유자인 수재가 천재의 식어버린 열정을 일깨워주는 이야기였지요.

   제 기억에, 피아노 연주 솜씨 자체가 가장 눈부셨던 영화는 크리스 크라우스의 〈포 미니츠〉(2007)입니다. 반항기 가득한 천방지축 망나니 소녀의 천재적 재능을 한 여인이 끈질긴 열정과 애정으로 발굴해 내고, 마침내 꽃피우는 과정이 참 감명 깊었지요.

   이 영화의 마지막 피아노 연주 퍼포먼스는 한마디로 압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말할 수 없는 비밀〉의 주걸륜이 울고 갈 명연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경우는 ‘이미 식어버린 재능’이 ‘여차저차해서 자칫 식어버리려는 재능’을 다시금 불타오르게 하는 이야기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리고 리처드 드레이퍼스가 피아니스트로 나왔던 조엘 올리언스키의 〈사랑은 선율을 타고(The Competition)〉(1980)라는 영화가 기억납니다. 폴(리처드 드레이퍼스)이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하여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제5번 ‘황제’를 멋들어지게 연주해 내고 우승의 꿈에 부풀어 있다가, 그만 프로코피에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3번을 연주한 여자친구 하이디(에이미 어빙)에게 1등을 빼앗기는 이야기였지요.

   이 영화는 막상막하의 재능과 재능이 서로 불꽃 튀게 맞부딪는 이야기로, 콩쿠르의 가장 일반적인 모습을 생생히 보여주어 매우 흥미로웠던 작품이었습니다.

   마침내 ‘콩쿠르’라는 말이 나왔네요. 이제 그 이야기로 넘어가겠습니다.     


콩쿠르의 진정한 의미, 또는 나만의 길 찾기

   〈피아노의 숲〉은 콩쿠르의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어떤 발언을 하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콩쿠르에 참가한 세 주요 인물(슈헤이, 카이, ‘변소 공주’ 다카코)이 차례로 무대에 올라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은 그대로 이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과정에 대응됩니다. 이 점이 핵심입니다. 선의의 경쟁이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한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다카코와 카이와 슈헤이는 서로서로 경쟁 관계입니다. 당연하지요. 왜냐하면, 같은 콩쿠르에 참가했으니까요. 한데, 이들은 서로 경쟁을 벌이는 과정을 통하여 진정한 경쟁은 자기 자신과의 경쟁이라는 진리를 배웁니다. 이 과정에 대한 묘사가 절묘합니다.

   먼저 슈헤이가 무대에 오릅니다.

   슈헤이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꾸준히 연습을 해온 친구답게 그야말로 훌륭하고 모범적인 연주를 합니다. 슈헤이는 연주를 끝마치고 ‘해냈다!’라고 확신합니다. 그 근거는 ‘실수를 하나도 하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충분히 동의할 만합니다.

   다음은 다카코 차례입니다.

   다카코 또한 연주를 끝낸 뒤 ‘해냈다!’라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그 근거는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았다’라는 것입니다. 이 또한 충분히 동의할 만합니다.

   마지막으로 카이의 차례입니다.

   카이 역시 연주를 끝마치고 ‘해냈다!’라고 확신합니다. 그 근거는 ‘나답게 연주했다’라는 것입니다.

   관객들에게 가장 열렬한 기립박수를 받은 사람은 카이입니다. 이 또한 충분히 동의할 만합니다.

   이제 합격과 불합격이 갈립니다.

   카이는 낙방입니다. 왜냐하면 카이의 연주는 너무도 카이다운 연주였기 때문입니다. 카이를 가르친 선생님은 말합니다. 이것이 콩쿠르의 한계라고요. 카이의 연주는 콩쿠르를 뛰어넘는 연주였다고요. 일본이라는 무대는 카이에게 좁다고요.

   한데, 이 결과 앞에서 슈헤이는 ‘내가 졌다!’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슈헤이는 ‘수재답게’ ‘천재’인 카이의 연주가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그 진가를 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카이를 가르친 선생님께 마음을 탁 터놓고 겸손하게 여쭈어봅니다.

   “저도 카이만큼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연주를 할 수 있을까요?”

   바로 이 장면입니다. 제가 슈헤이를 칭찬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 대목 때문입니다.

   여기서 마침내 슈헤이는 ‘인정’에서 더 나아가 ‘실천’에 도달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살리에리가 끝내 못 해낸 일입니다.

   슈헤이는 카이를 경쟁자로 여겼지만, 결국 자신은 카이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그 마음을 실천해 낸 것입니다. 이로써 슈헤이는 선생님 앞에서 자신이 카이보다 못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밝힌 셈이니까요. 여기서 선생님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가 멋집니다.

   “너는 피아노를 더 사랑할 필요가 있어.”

   그리고 진심으로 덧붙입니다.

   “훌륭한 연주였다.”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의 색깔을 찾는 것이 연주가의 진정한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

   그러니, 콩쿠르와 같은 식의 순위경쟁은 더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바로 이 점을 깨닫게 하는 것이 콩쿠르의 진정한 기능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이를 두고 단순히 ‘교훈적’이라고 치부하고 말기에는 그 감동이 너무나 깊습니다. 적어도 제게는 그랬습니다.

   저는 이 세 아이의 장래가 매우 밝다고 믿습니다. 자기만의 색깔, 자기만의 길을 찾은 피아니스트는 단순한 기예의 소유자가 아니라, 이미 한 사람의 진정한 예술가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슈헤이는 슈헤이대로, 카이는 카이대로, 다카코는 다카코대로, 피아니스트로서 그들의 장래가 참 궁금해지는 아이들입니다. 저는 이 세 아이의 미래를 진심으로 응원하고, 공평하게 지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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