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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스톤 Jun 16. 2023

이기대 갈맷길을 걷다

오늘도 건. 즐. 맛!

부산 이기대 갈맷길.

기쁠 때나 우울할 때 찾아가면 나를 반겨주고 달래주는 곳이다.

오늘은 기쁨과 우울함이 반쯤 섞인 날.

이럴 땐 바다내음 가득한 갈맷길이 나를 부른다.

동생말 주차장을 출발하여 오륙도 선착장까지 4.7km를 왕복, 해안선을 따라 총 9.4를 걷는 아기자기한 코스다. 동생말 주차장에 도착해서 스트레칭하며 몸을 풀어본다.   

(동생말 전망대에서 바라본 마린시티와 광안대교)    


동생말 전망대로 올라가니 광안대교와 마린시티가 두 팔을 벌리고 미소 짓고 있다. 거대한 공룡 한 마리가 누워있는 것 같다.      

왼쪽에서 파도소리, 오른쪽에선 새들의 합창.

흥얼흥얼 콧노래 부르며 한발 한발 힘차게 내딛는다.     

산책로에 피어있는 들꽃에게 인사한다.

잘 지냈어? 밤에 안 추워? 여긴 미세먼지 없지?

대답 대신 방글거리는 금계국, 개망초. 어라, 엉겅퀴도 있네.     

강아지 두 마리가 신나서 폴짝거리며 지나간다.

목줄을 잡고 걷는 젊은 주인들의 재잘거리는 표정이 푸릇푸릇하다.    

(어울마당)   

  

해돋이 보는 곳으로 이름난 어울마당에 도착한다. 가끔 공연도 하는 곳이다.

‘해운대‘영화 촬영 장소 표시판 앞에 서서 지난날을 되돌아본다.

음악 같았던 이삼십 대, 영화 같았던 사오십 대를 떠올리며

남은 여정도 기억에 오래 남을 추억으로 장식하길 다짐해 본다.

여기서부터 산책로가 바닷가 길 (아랫길)과 허리길(중간길)로 나뉘었다가 일정 거리 후에 합쳐진다. 평소처럼 바닷가 길로 갔다가 중간 길로 오기로 한다.     

바람소리, 파도소리에 맞춰 ‘나는 누구인고’를 콧노래로 불러본다.

노래가 끝날 즈음 나뉘어졌던 길이 합쳐지고 조금 후 철망이 나타나는데, 걷는 방향으로 직진해야 갈맷길로 이어진다.

(화살표 표시가 애매해서 위쪽 도로변으로 올라갈 수도 있다.)     

(산책로 화살표가 애매하게 표시되어 있음)    

산행 때 판단 착오로 정해진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들어섰다가 혼쭐났던 기억을 떠올리며 열어놓은 철망을 통과한다. 유혹에 빠져 위험한 길로 들어섰다가 ‘아차’ 정신 차리고 급히 빠져나왔던 때가 생각나서 미소 한번 짓고. 이제부터는 돌다리도 조심조심 두드려가며 걸어가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치마바위)     

바다에서 보면 치마처럼 생겼다 해서 이름 붙여진 치마바위로 내려간다. 낚시 포인트라서 몇 분이 낚시를 하고 있다. 시간을 주고 즐거움을 낚고 있는 건가.

낚시하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욕에 눈이 어두워 낚싯밥에 걸릴 뻔했던 지난날이 떠올라 잠시 눈을 감고 ‘정신 똑바로 차려! ‘ 속으로 소리쳐본다.  

   

(전망대에서)     

전망대에서 제주 외돌개 비슷하게 생긴 바위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신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저게 뭐지? 자세히 보니 해오라기다. 대장 앞에서 차렷 자세로 듣고 있는 모양새가 묘해서 ‘600 만불의 사나이’처럼 줌으로 댕겨본다. 대장이 외치고 있다. “이 근처에 고기는 많은데 낚시 바늘, 버려진 그물에 조심들 해!” 해오라기들이 다치지 않고 안전하게 먹이활동 하기를 기원하고.    

 

시원한 바람 한 줌이 살랑 지나가자 외국인 커플이 전망대 의자에 도착한다. 앗, 그동안 공부한 실전영어를 점검해 볼 기회다. 얼른 머릿속에 영어 문장을 만들어본다. 여기 경치 좋죠?, 어디서 오셨나요? 한국은 처음이세요? 문장을 다 만들고 나서 막 말해 보려는데, 휭 가버린다. 멀뚱.  삶은 타이밍...     


(망부석 바위 - 헤비스톤이 맘대로 작명)     

바위가 망부석을 닮았다. 애기를 업고 지아비를 기다리는 모습이다.

얼마나 기다리면 바위가 될까. 그리움, 기다림. 지난 어느 날 산자락 바위에 걸터앉아 한나절 동안 그녀(?)를 기다렸던, 나의 최장 기다림 기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원숭이 얼굴 바위 - 헤비스톤이 맘대로 작명)     

이 위치에 오면 꼭 찾는 곳, 원숭이 얼굴 바위에 도착한다. 인류의 초창기 모습 같다.

문명에 지쳐 과거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눈빛으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현재시점에서 인류의 문명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잠시 생각해 본다.   

       

(농바위 뒤로 오륙도가 보인다)

농바위 전망대에 도착하니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있는 할매 모습 뒤로 오륙도가 눈에 들어온다. 할매는 무얼 팔려고 여기까지 보따리를 이고 왔을까. 어렸을 때 동네 집집마다 꿀 팔러 다니던 어느 할머니가 생각난다.

     

(오륙도)     

오륙도 스카이워크에 도착하니 오륙도 섬의 이름과 위치, 육지에서 바라보면 섬이 두세 개로 보이는 이유를 잘 설명해 놓았다. 오륙도가 잘 보이는 언덕 위로 올라와서 커피를 꺼낸다. 지금부터 멍 때리는 시간.     

냐옹~소리에 옆을 바라보니 들 고양이가 날 쳐다보며 애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다. 배낭에 뭐가 있나 뒤져본다.    

 

 

갔던 길을 다시 거꾸로 걸어다. 갈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경치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음의 상태에 따라 눈에 보이는 것도 다르다. 다시 마린시티 공룡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서서 바라보고 있으니 지나온 시간들이 빠른 속도로 스쳐 지나간다. 35년간 거대 공룡 집단속에서 조직이 원하는 방향대로만 착실하게 걸었던, 가장의 책임감을 어깨에 지고 그냥 묵묵히 걸었던 시간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될 정도로 피를 말리는 스트레스 속에서 잘 견뎌냈던 시간들.      


지나고 보니 모두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렸다.      


이제부터는 천천히 소확행 하며 걸어가야 할 시간들.     


오늘도 건. 즐. 맛! 하루가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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