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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김여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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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스톤 Sep 09. 2023

내가 뭘 잘못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

요즘 매일 김여사한테 야단맞고 있다. 김여사는 애정이라고 말씀하시고 나는 야단친다고 항변한다.

내가 퇴직하기 전에는 내게 늘 부드럽게 대했다. 아침 출근할 때는 “잘 다녀오세요” 볼에 뽀뽀를 해주었고, 퇴근 후 아파트 문 열고 들어가면 “ 잘 다녀오셨어요?”

여기 홍삼차!

주말에는 이산 저산, 이 지방 저 지방 살방살방 함께 잘 다녔는데…

정년퇴직하고 나서 뭔가 조금씩, 크게 느껴지는 것 없이 김여사 말씀에 살금살금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김여사는 연애시절부터 공인받은 ‘천사’였다. 결혼 전에는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짜증내거나 삐친 일이 없었다. 친구나 지인들은 우리 둘을 아니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그런데 퇴직 후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김여사에게 호랑이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이불 걷어내기에다 헤드록 시범을 보여주는 여전사로 변했다. 내가 잘못한 거라도 있나 곰곰이 생각해도 딱히 없는 것 같다.


회사 다녔을 때 제일 많이 해 본 일이 문제 분석과 대책 도출이라서 문제점 분석부터 해보기로 했다.

우선, 야단맞을 때마다 메모를 해보았다. 수십 가지나 되는데 자주 듣는 야단만 적어보았다.


1. 알람 소리에 눈은 떴는데 핸드폰 (브런치) 보며 미적대고 있으면, 후딱!

2. 아침밥 차려놓았는데 브런치 본다고 꾸물럭거리고 있으면,  빨리 식사하세요!

3. 건강보조제 먹는 것 까먹고 있으면, 이 사준 건데!

4. 구피 물 갈아준다고 온 정성을 다하고 있으면,  

그 애정 반만 나한테 주면 안 될까요!

5. 차려준 반찬중 손 안 대는 것 있으면, 맛없어요?!

6. 화장실 청소하고 나오더니, 앉아서 누면 안 될까요!

7. 실컷 설거지했는데, 빠득빠득 쫌!

8. 밥 잘 먹고 있는데,

쫌 흘리지 마셔!

9. 핸드폰 깜빡하고 나갔다 다시 들어오면, 정신 쫌!

10. 함께 공원을 걷다가 옆이 허전해서 뒤 돌아보면 한참 뒤에서, 천천히!

11.(공원 걸을 때) 김여사가 손을 살며시 잡을 때 깜짝 놀라서 물러서면,  왜에?

12. 고속도로에서 120km 넘어가면, 속도!

13. 분리수거할게 좀 쌓이면,  안 보여요?!

14. 등산 갔다 와서 아무 데나 옷 벗어 놓으면, 제자리!

15. 티브이 보다가 자려고 침대로 가면, 양치하세요!


내가 김여사의 중2 아들이 아닌지 자주 혼란스럽고 아무리 분석해 봐도 딱히 야단맞을 일은 없는 것 같다.

'퇴직 후의 만수무강'에 대해 나름 공부를 해서 김여사 지시를 잘 듣는 편이고, 일식이와 이식이 사이에 있고, 용돈 올려달라는 소리 더 이상 안 하고, 설거지 잘하고, 분리수거 잘하고, 빨래 잘 개고...

아니 뭘 얼마나 더 잘해야 되는데!!!


며칠 전, 함께 공원을 걷고 집에 와서 김여사가 라면을 끓였다. 맛이 이상했다. 가락국수맛이 났다. "맛이 좀 이상한데?"  면 두 개에 스프 하나를 넣었단다.  

"싱거운 게 몸에 좋아요!"


어제는 티브이 보다가 옆에서 뿌웅 하셨는데 아무런 내색이나 미안하다는 말도 없다. 오늘 아침에는 등짝 후려치기까지 다. 점점 강도가 커지고 있다.


혹시... 내가... 백수가 된 후로 수입이 없어서 그런가…

오늘 저녁에 진지하게 여쭈어봐야겠다.


(일단, 내 방에  배낭과 옷가방 큰 것 하나를 준비해 두었다)





표지 사진 :  Daum



(이때가 그립습니다.1989년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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