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금 씨 삶을 돌아보다 (1회)

by 헤비스톤

생금 씨는 1928년 어느 가을날에 부산 사상구 한 시골마을 김 씨 집안 2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시대상황이었는지 집안사정이었는지 생금 씨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는 못 가고 농사짓는 부모님을 도우며 살았다. 아리따운 나이가 되자, 건너 건너 마을에 공무원이며 잘생긴 갑수 총각을 중매로 만나 스무 살 무렵에 삼락동으로 시집을 갔다. 정적인 시아버지, 맘씨 좋은 시어머니와 평화로운 전원 동네에서 논농사 밭농사를 지으며 4남 1녀를 낳고 평범한 시골 아낙네로 살았다.


시댁에는 시아버지가 젊었을 때부터 열심히 일해서 이루어놓은 논밭이 제법 많았다.

밭농사는 배추, 참외, 당근 등을 심었고 수확기에는 도매상인이 차로 실어갔다.

논농사 때는 일꾼들 '참' 먹는 시간에 음식 나르기가 일이었으나 수확한 나락을 집마당에 쌓아놓고 여러 대의 탈곡기로 터는 행사를 할 때는 마냥 즐거웠다.

남편 갑수 씨는 철도 공무원 생활을 계속하면서 주로 쉬는 날에 농사일을 거들었다.


여름방학이 되면 타지에 사는 조카들이 놀러 와서 이삼 주씩 머물다 가곤 했고, 자식들도 강둑과 논밭을 뛰어다니며 건강하게 잘 컸다. 삼락동은 부산 외곽인 낙동강가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전형적인 전원마을이었다. 티브이 드라마 ‘전원일기’ 분위기와 비슷했고 생금 씨(농사), 갑수 씨(공무원) 상황도 김혜자, 김용건 씨와 비슷했다.


생금 씨의 평범한 농촌생활에 변화가 온건 낙동강변에 낙동대로를 만들기 시작한 1968년 무렵이었다. 도로가 시집을 관통하게 되어 이사를 해야만 했다. 시집에서는 장남 갑수 씨의 의견에 따라 논밭 모두를 정리하고 부산진구 00동으로 이사했다. 논밭 판 돈으로 시장 입구에 2층집을 샀고 근처에 집 두 채를 더 살 수 있었다.

2층에는 먼 친척 아저씨가 사진관을 열었고, 1층에서는 공무원생활을 그만둔 갑수 씨가 생금씨와 참기름 장사를 시작했다.

(이때, 셋째 아들 스톤은 국민학교 1학년이었다)


갑수 씨는 직접 손으로 참깨를 볶아서 수동기계로 짰고, 장사를 처음해 본 생금 씨는

손님이 10원어치 달라고 하면 20원어치 줬고 50원어치 달라고 하면 100원어치 담아줬다.

갑수 씨나 생금 씨는 장사해서 이득 남기는 것보다 손님에게 어떻게 하면 잘해줄까 생각만 했다. 그러다 보니 장사 3년째인데도 남는 게 하나도 없었다. 생활비는 남아있던 돈으로 충당했다.


생금 씨에게 시련이 오기 시작한 건 이사하고 3년이 지날 무렵이었다.

가게를 오가던 사람들 중에 생금 씨 부부가 사람말을 잘 믿는다는 걸 안 지인들이 교묘한 방법으로 사기를 쳐서

갑수 씨와 생금 씨는 큰돈을 날리게 되었고, 그 충격으로 갑수 씨는 쓰러졌다.

설상가상으로 안 좋은 일이 또 발생했다. 2층 사진관에 불이 나서 2층이 모두 타 버렸고 친척아저씨는 아무 조치도 하지 않고 자취를 감추었다.


생금 씨는 불탄 집을 수리한 후 전세 줬던 집 두 채와 모두 정리해서 빚을 갚았고, 조금 작은 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때는 아이들이 모두 초중고를 다니고 있었고 시부모도 살아계다. 갑수 씨가 금전적으로 살림에 보탬이 안되자 생금 씨가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야만 했다.

마침 새로 이사한 집이 골목 길가에 위치해서 한쪽을 개조해 조그만 미장원을 차렸다.

미용 기술이 없는 생금 씨는 미용사를 두 명 고용해서 미장원을 운영했고 이웃 사람들은 생금 씨를 김마담이라고 불렀다. 생금 씨가 생활전선에 뛰어든 시기에 그림과 노래에 소질이 있는 갑수 씨는 동네 선술집 몇 군데에서 인기손님으로 자리 잡았다.


국민학교 고학년 때로 기억한다. 저녁식사 때가 되면 종종 엄마가 어디 어디 술집에 가서 아버지 모시고 오라고 했다. 술집에 도착하면 박수소리와 아버지 노랫소리가 문밖에서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가게 문을 살며시 들여다보면 아버지는 손님들에 둘러싸여 남인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가게 벽면에는 낯익은 그림이 걸려있었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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