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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비스톤 Oct 31. 2023

생금 씨 삶을 돌아보다 (2회)

 생금과 갑수는 신혼 때부터 부부금실이 좋아서 동네에서 소문이 났었다.

갑수는 성격이 온순한데도 생금한테 장난치듯 애정표현을 잘했고, 생금도 살림을 잘하고 시어른을 잘 모셔서 둘은 싸울 일이 없었다.

하지만 이사 후 장사를 하면서 안 좋은 상황이 이어졌고, 갑수의 건강이 회복되었으나 경제활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갑수는 심심할 때 집에서 그림을 (꽤 잘) 그렸고, 술을 좋아해서 술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술을 마시고 기분이 좋으면 종종 술집에서 노래를 (꽤 잘) 불렀고, 그렸던 그림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갑수가 술을 마시고 집에 오면 조용히 잠을 잤다. 한 번도 집에서 목소리를 높인 적이 없었다. 생금은 돈을 벌지 못하는 갑수가 답답했지만 집에 피해 주는 일은 하지 않았기에 아프지만 말기를 바랐다.


  미장원은 초기에 잘되었으나 근처에 큰 미장원이 새로 생기면서 생금의 미장원에 손님이 줄어들어 직원 월급주기가 빠듯해졌다.

하필 이 시기에 시어머니가 갑자기 몸져누우셨다. 중풍이라고 했다. 시어머니는 누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해 생금이 미장원 일을 해가면서 1년 반동안 병시중을 했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큰방 앞 마루에 빈소를 차려놓고 매달 두 번씩 상을 올리고 곡을 했다.


할머니가 몸져누우셨을 때 외삼촌과 고모들이 자주 집으로 왔다. 할머니 드실 것을 사 오면서 우리들 과자도 사 왔던 게 기억이 난다. 엄마가 할머니 병시중을 도맡아 하셨는데 용변받을 때 옆에서 지켜보기도 했고 엄마가 바쁠 때는 내가 대신하기도 했다.


  그때쯤, 공고 전기과를 나온 장남이 남의 가게 일을 그만두고 직접 전파사를 해보겠다고 해서 생금은 미장원 집을 팔아 가게를 차려주고 언덕 쪽으로 집을 옮겼다.

비록 이전에 비해 초라한 집이었으나 식구들이 살 방 두 개와 남에게 세를 줄 방 두 개가 있었다.

장남 가게는 자리를 잡는데 시간이 걸렸고 생활비 나올 곳이 없게 되자 생금은 지인의 도움으로 동네 시장통에서 조그맣게 장사를 시작했다. 지인가게 옆 조그마한 구석에서  건어물, 소금,  쥐포 등을 팔았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들 얼굴을 보면 창피해서 고개를 못 들었는데 한 달쯤 지나자 생금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그런대로 생활비에 보탬이 되어서 4~5년을 계속했는데 아들들이 커서 취업을 하게 되자 장사를 그만하게 했다. 장사를 하면서도 집에 혼자 계신 시아버지를 동네 경로당까지 매일 손잡고 모시고 다녔고 하루 세끼 식사를 챙겨 드렸다.


내가 고등학생 때였다. 엄마가 장사하는 모습이 궁금해서 시장통에 가보았다. 엄마가 앉아있는 자리 앞에는 조그만 좌판이 있었고 그위에는...

나는 엄마 곁으로 가지 못하고 멀리서 지켜만 보았다, 부끄러웠다.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갑수의 건강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병원에서는 술로 인한 간경화라고 했다. 여기저기 수소문해서 간에 좋다는 한약과 민간 치료제를 써 보았으나 상태는 점점 더 나빠졌다. 갑수는 환갑을 몇 달 앞두고 생금을 남겨둔 채 먼저 하늘나라로 떠나버렸다.


생금 씨는 엄마로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최선을 다해 살았다.

무엇보다 아들 , 자식들에게 제일 많은 정성을 쏟았다.

엄마가 자식들을 위해 헌신한 일들은 너무 많아서 훗날 책으로 엮어 나의 두 딸에게 남길 생각이다.


  몇 년 뒤, 생금은 어린 손주 둘을 돌보러 거처를 정리해서 큰아들집으로 들어갔다.

몇 년 지내다 보니 아들집 위치가 친구들이 사는 동네와 떨어져 있고 놀러 다니기 힘들고 갑갑했다.

손주들도 컸고 해서 친구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으로 방을 얻어 나왔다. 그러고는 홀가분하게 혼자 지내며 친구들과 십 원짜리 화투도 치고, 각종 행사에 놀러 다녔다.

그리던 중에 생전 처음으로 미국땅을 밟게 되었다.


(3부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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