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문득, 오페라를 부르다 밑도 끝도 없이 오리가 되어버린 여자의 심정이 알고 싶어졌다. 그것은 특별한 감정이라기보다, 산에서 따온 진달래 꽃잎을 우물 속에 감추는 행위보다 조금 더 형이상학적인 감정에 가깝다.
미술에 빗대어 본다면, 색(色)이 감성과 연결되고 선(線)이 지성과 닿듯, 회화는 본래 지성이 아닌 감성에 호소하는 예술이다. 회화의 예술적 본질은 규정된 윤곽선이 아니라 풍성한 색채에서 발현된다. 윤곽선을 선명하게 사용하면 대중적인 명료함은 얻을 수 있으나, 작가의 내밀한 의도는 가려지기 쉽다. 반대로 색채를 과감하게 쓰면 예술적 깊이는 확보되지만, 관객에게는 난해한 영역이 된다.
하지만 오페라를 부르다 오리가 되어버린 여자의 그 기괴하고도 고독한 심정을, 단지 색과 선만으로 온전히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이때 떠오르는 화가가 있다. 화면에서 가시적인 대상을 모두 지워버린 채, 검은 사각형과 검은 원만 남긴 카지미르 말레비치다.
선과 색만으로 오리가 된 여자의 심연을 담을 수 없다면, 저 무거운 검은 침묵으로 대신하는 건 어떨까. 모든 형상이 소거된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라면, 속 깊이 상처 입은 여인의 심정도 비로소 구원받을 수 있지 않을까.
여자는 이제 화려한 조명이 쏟아지는 무대 중앙에서 고개를 돌린다. 아리아를 토해내던 목구멍은 둔탁한 울음조차 내지 못한 채 닫혀버렸다. 관객들의 수군거림과 날카로운 시선이 그녀를 찌른다. 세상이 요구하는 ‘오페라 가수’라는 선명한 형체는 이미 무너졌는데, 사람들은 여전히 그녀에게서 인간의 노래를 기대한다.
그때,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 거대한 입을 벌린다. 그것은 심연이자, 모든 소음이 소멸하는 절대적 안식처다. 여자는 뒤뚱거리는 발걸음으로 그 검은 평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그곳엔 빨강도, 파랑도, 노랑도 없다. 감정을 강요하는 색채의 소란함이 사라진 자리에는 오직 ‘무(無)’의 평온만 존재한다.
사각형의 네 모서리가 여자를 감싸 안는 순간, 비로소 그녀는 깨닫는다. 오리가 된 비극보다 더 잔인했던 것은, 완벽한 선과 색으로 자신을 포장해야 했던 무대 위의 삶이었다. 검은 사각형 안에서 여자는 더 이상 오페라 가수도, 길 잃은 오리도 아니다. 그저 존재할 뿐이다.
비로소 모든 구속에서 벗어난 여인의 심장 소리가, 검은 침묵을 배경 삼아 규칙적으로 울린다. 그 소리는 노래보다 아름답고, 진달래 꽃잎보다 붉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여자는 가장 자유로운 날갯짓을 시작한다. 가시적인 세계를 지워버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지독하게 고독하고 완벽한 구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