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과 침묵

by 김준완



1. 달팽이

회복 불가능한 흔적으론 만 남게 된 달팽이는
느림의 무게를 나선형 껍데기 하나로 버텨낸다

언어가 그림자를 닮아가는 순간
달팽이의 입은 곰팡이처럼 부서지고
몸 안에서는 냇물 같은 느림이 넘쳐난다

생각이 생명에서 멀어진다
지을 수 없는 흔적들이 생명을 완성한다
까마득한 날을 건너온 달팽이는
느림의 무게를 나선형 껍데기 하나로 버텨낸다

자생한 것만큼 온전한 것은 없다

2. 누이

부재가 쌓일수록 침묵으로 존재하는 누이
누이는 날마다 야위어 간다

점점 작아져
낯선 아이가 된다

3. 무덤가

붉은 눈을 가진 회색 물고기들만
말없이 무덤가를 지켜 선다

기억이 망각된 날
생각이 생각되지 않는 날
무덤가엔 할미꽃이 그득하다

나의 엄마의 엄마의 엄마가
무덤가 할미꽃을
실성한 듯 쥐어뜯다 마다를 반복한 것도
살아남고 싶어서였으리라

그해 겨울
눈 꽂이 바람에 툭 떨어지는 소리가
괴성처럼 들렸다

비밀을 가진 자만이
영혼을 간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