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아폴론과 디오니소스. 제우스의 두 아들이 상징하는 세계는 인간이 세상을 마주하는 두 가지 근원적인 얼굴이다.
아폴론이 태양의 빛 아래 법과 질서를 세우는 차가운 이성이자 명료한 '개별화의 원리'라면, 디오니소스는 술과 시, 대지의 풍요를 관장하며 경계를 허무는 뜨거운 광기이자 '근원적 일체감'이다.
니체는 이들의 이름을 빌려 조각상의 정적인 아름다움을 아폴론적 예술로, 영혼을 뒤흔드는 음악과 무용을 디오니소스적 예술로 명명하며 감각의 이분법을 제시했다.
이는 인간이 질서 있는 문명을 세우는 동시에, 왜 끊임없이 그 울타리를 부수고 야생의 황홀경으로 돌아가려 하는지를 설명해 준다.
우리는 흔히 정신의 절정에 이르는 세 가지 길로 시와 수학, 음악을 꼽는다.
언뜻 이질적으로 보이는 이 영역들이 정점에서 만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비례'와 '율동'이라는 공통분모 때문이다.
아폴론적 수학이 정지된 비례의 질서라면, 디오니소스적 음악은 시간 속에서 흐르는 비례의 율동이다.
이 지점에 이르면 감각은 단순히 외부 자극을 수용하는 단계를 넘어, 그것을 해석하고 통합하는 고도의 이성과 맞닿게 된다. 전형적으로 미술과 음악을 예술의 두 줄기로 꼽는 것 역시, 시각과 청각이라는 인간의 가장 핵심적인 두 감각이 각각 '질서'와 '흐름'을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 철학의 역사는 이 시각과 청각의 주도권 다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데카르트에서 시작해 근대로 이어지는 '로고스 중심주의'는 대상과 거리를 두고 관찰하는 시각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했다. '이론(Theory)'의 어원이 '본다(Theoria)'는 것에서 유래했듯, 시각은 대상을 객관화하고 지배하는 이성의 도구였다. 하지만 데리다와 들뢰즈 같은 현대 사상가들은 이러한 시각적 재현의 견고한 틀을 깨고, 보이지 않는 목소리와 비정형의 흐름에 주목하며 사유의 영토를 확장했다.
이러한 서구의 사유가 '거리'를 둔 관찰에 머물 때, 동양의 유식불교(唯識佛敎)는 훨씬 내밀하고 본질적인 곳을 응시했다.
바로 '촉각(觸)'에 대한 깊은 이해다.
유식학에서 촉각은 단순히 피부에 닿는 물리적 감촉이 아니다.
그것은 감각기관(根)과 대상(境), 그리고 우리의 의식(識)이 만나는 근원적인 사건이다. 서양이 '보는 것'을 통해 나와 대상을 분리하여 주체와 객체의 성벽을 쌓았다면, 유식은 '닿는 것'을 통해 그 성벽이 무너지고 만물이 서로 의지해 있다는 연기(緣起)의 세계를 포착했다.
만지는 자가 동시에 만져진다는 촉각의 상호성은 '나'라는 고립된 자아를 깨부수는 가장 강력한 감각적 체험인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여정은 이제 사진과 영화, 그리고 가상현실이라는 현대 매체의 파도 위로 이어진다.
발터 벤야민이 통찰했듯, 현대의 시각 매체는 더 이상 멀리서 감상하는 대상이 아니다.
스크린 속의 빠른 몽타주는 관객의 시각을 넘어 신경계를 직접 타격하는 '촉각적 충격'으로 다가온다. 기술이 오감을 완벽히 시뮬레이션하고 대체하려는 오늘날, 우리는 역설적으로 묻게 된다.
기계가 재현할 수 없는 인간만의 실존적 감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아마도 데이터화할 수 없는 찰나의 '닿음', 즉 세계와 내가 부딪히며 발생하는 생생한 존재의 불꽃일 것이다.
오감을 정리하며 깨닫는다.
감각이란 세계를 분절해서 받아들이는 다섯 개의 창문이 아니라, 세계라는 거대한 바다에 온몸을 던지기 위한 하나의 통로임을.
아폴론의 명징한 질서로 시작된 사유가 디오니소스의 취기를 지나 불교의 접촉으로 나아가는 과정은, 결국 타자와 세계를 향해 나의 경계를 허물어가는 고귀한 체험이다.
질서와 광기 사이, 그 위태로운 경계에서 우리가 무언가에 깊이 '닿을' 때, 비로소 세계는 진정한 의미로 우리 안에서 깨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