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들
황금도 유황도 몰약도 없이 나는 빈 손으로 서 있다
그럼에도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어
그 소리에 혀끝까지 올라오는 말이 있지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그러나 막상 꺼내려하면 내 안은 이름 붙지 않은 방처럼 비어 있는 거야
그럴 때면 나는 아직 오지 않은 방향을 향해 질문을 던지는 거지
무릎을 접고 등을 안쪽으로 말아 그늘에 몸을 숨긴 채 살아온 이 존재를 누가 알까
손가락을 펴면 거기엔 늘 공기만 고여 있었고
허공은 한 번도 나를 붙잡지 않았지
그래서 오늘 몸의 각도를 바꾸는 거야
지나가던 허공이 우연히 떨어뜨린 내가 살아가는 법을 말해 보려 해
내가 만든 거울은 나만 비추고
하루에도 열두 번 울고 웃고
처음의 말과 끝의 말이 늘 똑같다
지루한 내가 싫어서 당신 거울을 찾으면
당신은 하루에도 열다섯 번 울기만 하고
처음 말과 끝말이 항상 다르고 불안한 당신이 무서워 또 내 거울을 찾는다
내 거울은 또 울기 시작한다
밤마다 잠들지 않는 너의 숨이 길게 이어지고
어둠 속에서 같은 소리가 몇 번이고 되돌아왔다
나는 그것을 짐승의 소리라고 불렀지
꿈속에서 여우 하나가 목을 길게 세운채 소리를 놓지 않았고
생명들은 하나 같이 삶을 견뎌내고 있었다
늦가을 갈대들도 바람에 몸을 비비며 쓰으쓱 쓰윽쓱 소리를 견디고 있었다
나는 이전보다 느리게 말한다
피해야 할 물을 이미 알고 있는 몸처럼.
현재의 자세는 우연이 아니다
나에게 남아있는 생명은 여러 번 바다에 닿은 뒤의 것
열두 번을 넘겨 몸을 던졌고 다시 수면을 찾았다
바다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고
몸만이 형태를 바꿨다
이제 나는 거울을 앞에 두지 않고
소리도 구분하지 않는다
몸은 한번 형성된 각도로 늘 서있을 뿐
허공은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빼앗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알고 싶었던 나는
아직 시작도 못했다.
자아들은 하릴없이 꾸벅꾸벅 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