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터의 요새

by 김준완

나는 생각이 마멸되었으니
내 가면을 벗겨 달라고, 나를 구원해 달라고
그토록 애원했건만
너는 거침없이 네 욕망만 채운 채 떠나갔다


네가 휩쓸고 간 자리엔 온기가 아닌
서늘한 침묵의 지문들만 어지럽고
구원을 갈구하던 나의 무방비한 살결은
너의 허기를 채우는 제단으로 바쳐졌다
나는 네가 유기한 껍데기를 모아 다시 성벽을 쌓는다


거울 속엔 여전히 벗겨지지 못한 가면이
기괴한 곡선을 그리며 나를 조롱하지만
이제야 알겠다, 나를 짓누르던 이 위악(僞惡)이
너라는 재앙으로부터 나를 지켜낸 마지막 허물이었음을


너는 나의 공허를 탐하였으나
결국 네 손바닥에 남은 것은 비어 있는 바람뿐
나는 이제 누구에게도 무릎 꿇어 구원을 구걸하지 않으리라


차라리 이 가면이 흉터처럼 내려앉아 살바람을 막아내고
무너진 폐허 위로 나만의 검은 꽃이 만개할 때까지
나는 나의 어둠을 기꺼이 의지하며
가장 고독한 신이 되어 그곳에 군림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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