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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명 Aug 03. 2018

Burning, 인식과 의미에 관하여

얕은 지식과 어휘로 풀어내는 무거운 후기 (미 관람자는 주의하십시오)

무언가를 강하게 움켜쥐다.


 나에게 정말 소중한 사람, 나만의 확고한 신념, 기저에 깔린 사고방식, 부와 명예 등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것들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유지 및 변화하며 살아간다. 이는 세상과 사람, 시간의 역사 속에서 저마다의 시행착오를 겪으며 굳어지는 인생의 방법이자 가치가 된다.


 감정과 이성을 잘 조화시켜 완벽한 결론을 내거나, 때로는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미숙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 혹은 어떤 사안에 대하여 이것이 정의이고 이것이 옳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특정한 가치나 결론들 중 어떤 것도 절대적인 명제가 될 수는 없다. 예를 들어보자. 어느 하나의 입장이 있다면 언제나 반대되는 입장이 있기 마련이다. 어느 한 쪽이 절대적으로 맞다고 주장하기는 힘든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보는 선도 누군가에게는 악으로 다가올 수 있다. 다수가 생각하는 사회적 좋음 역시 누군가에게는 고려 대상이 아닐 수 있다. 여러분이 읽고 있는 이 글에 대한 공감 정도나 평가 역시 매우 다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버닝이라는 영화는 이와 같은 인식의 양립과 상대성을 우리에게 아주 복잡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전한다.


 머리를 꽤나 굴린 탓인지 상영이 끝난 후 엔딩 크레딧을 보며 기분 좋게 영화관을 나온 것은 아니었다. 복잡 미묘한 감정들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와중 불현듯 머릿속에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나홍진 감독의 곡성이었다. 개인적으로 국내 영화 중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작품이다. 보고 싶은 대로 상황을 바라보는 인간 인식의 편협함을 꼬집어내는 감독의 의도가 담긴 작품으로 나는 곡성을 이해했다. 이러한 교훈은 버닝과 일맥이 상통한다고 판단했고, 다음의 두 항목에서 그러하다.




첫째. 의미

 이해하기에 비교적 쉬운 방법이었다고 생각한다. 묘한 긴장감이 흘러넘치는 세 인물 간의 관계를 조명하는 것으로 종수(나, 우리) - 혜미(의미, 소중한 것) - 벤(외부의 힘, 사회적 환경)이라는 설정을 통해 영화의 줄거리를 이해했다. 일상을 살아가며 나(종수)에게 언젠가 갑자기 의미 있고 소중한 것(혜미)이 찾아온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특정한 힘과 상황(벤)은 때때로 우리에게 불가항력으로 작용하며 모든 것을 앗아가고 심지어는 재가되도록 태워버린다. 내가 힘껏 움켜쥐고 있던 것을 빼앗기고, 잃어버리게 되면서 좌절하고 외부를 향한 분노로 이어진다. 이러한 표면적 줄거리 전반을 통해 이창동 감독은 분노하는 사회의 일면을 드러낸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또한 많은 장치와 은유들이 복합적으로 드러난다. 고양이, 우물, 벤과 종수의 요리, 비닐하우스, 도덕의 동시 존재, 혜미의 춤과 행방 등 무엇 하나 쉽게 해석되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를 불편함의 세계로 끈질기게 인도한다.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심어주면서 말이다. 하지만 무엇이 껍데기고 무엇이 실재인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특정한 방향과 기준 없는 광활한 사막에 우리의 사고방식을 홀로 서게 만든다.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고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스스로 내린 결정은 그 자체일 뿐 이상이나 이하의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겨난다. '의미를 부여해야 하는가?',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둘째. 인식

 영화가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 워낙 복잡하게 설정된 탓에, 원활한 해석을 하거나 특정한 결론에 이르지 못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이 영화는 어떤 해석을 하든 하지 않든 그저 관조하고, 혹여나 자신만의 사고방식으로 판단하려는 의도를 철저히 반대하는 것 같기도 하다. 습관적 인식의 뿌리를 아주 치밀하게 또 직설적으로 조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야기의 끝에서는 관객들로 하여금 태워질 것 같은 위기감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영화적 어법에 매력을 느낀 분들이 있다면 아마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감히 추측해본다. 굳이 답을 찾으려 하지 않아도(사실 정답이 없을지도 모르는) 그 과정에서 느끼게 되는 혼란과 두려움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핵심이라는 것을 말이다. 특정한 상황이나 조건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떠나, 좋고 나쁘고를 떠나 그 자체로 그럴 뿐이라는 사실을 반박하거나 뒤집을 수 있을 정도의 설득은 존재할까? 적어도 이 영화를 본 나에겐 있을 수 없다. 가능성과 상대성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내면 깊숙히 자리 잡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절대적인 답은 없다.


 통상적으로 1+1은 2이지만 누군가에게, 혹은 저쪽 세계에서는 그 답이 2가 아닐 수 있지 않은가. 언제나 둘 다 가능한 것이고 그 가능성을 우리는 과연 받아들일 수 있는가, 자신의 인식을 더 높은 곳에서 조감할 수 있는가, 언제나 열린 상태로서의 자신일 수 있는가, 그 상태는 나와 사회에 좋음혹은 나쁨으로 작용하는가 등의 뼈저린 성찰을 계속해서 유도하는 탁월한 사유의 경지에 박수를 보내며 감탄을 할 뿐이다.




"비가 오면.. 물이 넘치고 사람들이 떠내려가지. 근데 비가 판단을 해? 아니야. 

난 판단을 하지 않아. 그저 그렇게 되기를 기다릴 뿐이야." - 벤


 자유자재로 힘을 펼칠 수 있는 벤의 대사는 굉장히 무섭고 서늘한 느낌을 줌과 동시에 우리의 사고방식을 시험하는 일종의 장치로써 사용되었다고 생각한다. 흑과 백은 엄연히 다르게 보이나 둘은 같을 수 있고 심지어는 섞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전달 방식, 결국 우리가 버닝이라는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다양한 사회, 경제, 인문학이라는 실제적 영역 기저에 있는 인식의 대전환에 있지 않을까. 관념과 인식에 대한 지평의 확장을 핵심으로 마지막 한마디를 통해 부족한 글의 끝을 맺어보고자 한다.


어렵게 얻은 것을 강하게 움켜쥐어 새어 나가는 것이 두려울지라도,

그것의 상태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다면 비로소 우리는 인식의 수갑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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