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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명 Jul 22. 2021

걸음과 경험의 박물관 -1

안도 타다오의 경험 디자인, 제주 본태 박물관

긴밀한 신뢰


우선 마케팅 및 브랜딩과 관련된 용어로써 '충성도'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된다. 고객이 경험을 통해 특정 효용이나 만족을 얻었을 경우 해당 브랜드에 대한 신뢰 있는 애착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내가 지속적으로 찾게 되는 제품이나 서비스 등이 있다면 나는 그것들에 대해 높은 충성도를 갖는 고객이라는 의미이다. 이렇게 신뢰의 가치가 생겨나는 범위는 패션, 가정용품, 전자기기 등 나에게 만족을 줄 수 있는 모든 다양함을 포괄한다.


나의 경우 안도 타다오의 공간이 그렇게 작용한다. 그의 손을 거친 공간은 나에게 있어 장소에 대한 검색 이전에 "방문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충분한 로열티를 갖는다. 안도 타다오의 독특한 건축적 어법은 묘한 듯 편안한 균형미를 담아내며, 새로움과 여유의 가치들로 나의 시간을 다채롭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제주도에 방문했을 때 가볼 만한 곳들을 찾던 중 그의 손을 거쳐간 공간임을 확인하고 동행에게 제안한 후 바로 출발하게 되었다. 본래의 모양이라는 뜻의 본태(本態) 박물관, 가장 인상 깊게 느꼈던 부분은 잘 짜인 동선새로운 시선의 연속이었다. 그 안에서의 여정과 감상들을 여러분께 공유하겠다.



입장하기 전, 주차장 옆쪽으로 위치한 넓은 연못에 눈길이 간다. 파동 하나 없는 수표면은 고요함을 유지하며 푸른 하늘과 그 아래에 있는 박물관의 외관을 자연스레 담아낸다. 파란 우주 속에 떠 있는 듯한 부유감이 감돈다. 물의 반사 성질은 물성이 갖는 무게감을 가벼움으로 환기시킨다. 건축가의 의도가 담백하고 단순하게 표현되는 것은 대단히 정교한 설계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한 결과일 것이다. 따라서 무언가가 우리의 눈에 균형 잡힌 형태나 단순함으로 읽힌다는 것은 만든 이의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가 된다. 



첫 번째 시선 전환


매표소로 향하는 입구에서 본격적인 경험이 펼쳐진다. 그 이유는 사진과 같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시작점에서는 주변을 쉽게 둘러볼 수 없었지만, 길을 이동함에 따라 점점 벽의 높이가 낮아지며 전체적인 공간의 모습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공간의 첫인상을 완전히 개방된 형태로 보여주기보다 숨겨진 상태에서 서서히 열리는 흐름으로 우리의 인식을 열어주는 과정인 것이다. 잘 정리된 전체를 학습하기보다 숨겨진 가능성

체험하며 창의성과 흥미를 자극하는 건축적 동선의 힘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매표소 앞, 자연의 분위기를 잘 느낄 수 있도록 적절히 공간감을 낸 모습이다.


매표소와 기념품샵은 같은 공간에 있어 전시 관련된 다양한 상품들을 선택하기에 좋다. 본태 박물관은 총 5개의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고 박물관을 전체를 둘러보며 여유롭게 관람하라는 안내를 받았다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국내 최초의 박물관으로써 우리나라 전통문화의 가치와 공예품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2012년에 설립된 곳이다. 본래의 것이 가진 미(美)를 탐구하기 위한 목적을 갖고 있으며 강연, 답사, 문화행사 등을 수용하는 열린 문화공간으로도 활용 중이다.



지어진지 10년이 되어가는 건물과 주변 자연이 한 프레임 안에 담긴다. 하늘을 배경 삼은 콘크리트의 평면에는 그동안 겪어낸 시간의 흔적들이 묻어난다. 오래 입은 청바지의 워싱이 점점 돋보이게 되듯, 있는 자리에서 흔들림 없이 고유의 멋스러움을 더해가며 여전히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현재 진행형인 역사가 보인다. 중앙에 뚫려있는 곳으로 시선과 호기심이 향했고, 이후의 목적지로 점찍어둔 뒤 발걸음을 옮겨본다.



단순하고 높은 형태의 콘크리트 벽면은 안정감을 유지하고, 자연의 녹음은 걷는 사람의 눈을 편안하게 만든다. 두 요소의 조합이 이어지는 동선에서 일관되게 보이고 있어 일종의 통일감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걷는 순간마다 달리 보이는 건물의 선과 면들이 새롭다. 무엇보다 불편하게 다가오는 부분이 없고 시선이 닿는 곳곳에 안도 타다오의 공간 특색이 매력적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4,5 전시관 순으로 방문했다. 3관에서는 쿠사마 야요이의 대표 작품이 전시된다. 그의 유년기 시절 지역의 대표 농산물인 호박의 생김새에 애착을 갖게 되었고 이내 작품화로 이어졌다고 한다. 드로잉을 거치며 조각적 요소를 더하고, 신소재를 접목시킨 작품들을 제작 중이다. 또한 영혼의 광채라는 이름의 거울방은 빛들이 무한히 반사되어 우주적인 느낌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반복'과 '집적'이라는 표현 방식에 주목할만하다.



4관은 전통 상례를 주제로 상설 전시를 진행 중이다. 상여 관련 부속품인 꼭두와 거의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있는 상여를 관람할 수 있다. 이제는 찾아보기 힘든 전통 상례의 흔적을 보존하고 전시 중인 곳이다.



5관에서는 불교미술의 소장품 기획전이며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 속에서도 보존된 유물들이 전시되고 있다. 삶과 죽음, 그리고 내세의 세계까지 이어지는 통합적인 구성이다. 5관은 200평의 넓이와 높이 6미터의 규모로 내부의 넓은 공간감을 자랑한다. 아쉽게도 내부 촬영은 불가했다.



두 번째 시선 전환


전시관 입구 바로 옆에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사실 전시관보다 먼저 시선을 끈 곳은 여기였다. 콘크리트로 양 벽면을 세워 하늘을 배경으로 원근감을 표현하는 구조는 마치 제단의 형상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한 듯 보인다. 시선은 계단에서부터 하늘로 자연스레 향하며 펼쳐질 공간에 대한 신비감을 불어넣는다.

 


올라가다 뒤를 돌아보았다. 좁은 콘크리트 벽과 그 사이로 보이는 탁 트인 후경의 조화가 감탄을 자아낸다.

중앙에 위치한 산방산의 모습이 잘 보이도록 정확하고 세밀한 건축적 계산이 진행되었으리라. 무한히 뻗어나가는 공간감에 내가 편입되는 듯한 몰입도 높았던 경험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된다.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느낀다. 산방산을 중심으로 한 제주도 남쪽의 풍경이 넓은 하늘 아래 아무런 시각적 제한 없이 장대하게 펼쳐져 있다. 옥상 공간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가치 중 하나는 이러한 풍경이다. 있는 풍경을 그대로 빌려오는 건축적 기법인 차경(借)은 해당 공간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그것을 경험에 각인시키는 데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좋은 기억으로 남을 옥상이다.


본래 출발지였던 매표소 위치로 되돌아왔다. 1,2 전시관으로 향하는 갈림길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본태박물관이 지어졌을 당시에는 1,2관만이 존재했다. 3,4,5관은 2014년 이후 총 두 번에 걸쳐 추가 증설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1,2관은 본태 박물관의 건축적 핵심 요소들이 가장 잘 담기고 표현되는 곳이라 기대해보았다. 시간상 가장 먼저 기획되었고 그만큼 가치를 녹여내려는 의도가 깊었을 것이라 추측했기 때문이다.


2관은 현대미술 전시 갤러리로 두 개 층의 높이와 깊은 처마 아래로 홀의 전시실이 연결되도록 구성되어 있다. 방문하려 입구에 들어서자 신발을 벗고 들어가라는 표지가 있었다. 박물관을 맨발로 관람하다니! 실로 새로운 경험이 아닐 수 없다.



1층에는 앤서니 카로(Anthony Caro)와 데이비드 걸스타인(David Gerstein)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

계단으로 연결된 2층은 방으로 들어가기까지의 다리에서 유리창을 통해 산방산이 보여 시원한 느낌이다.

그리고 백남준의 작품들과 안도 타다오가 만든 특별 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본태 박물관 설계 과정 전반을

볼 수 있는 모형과 건축 과정을 기록한 스틸컷이 남겨져 있다.


덧붙이고 싶은 좋은 경험은 친근함이다. 내부 인테리어나 전시물들이 우리의 일상에 친근하게 다가왔다거나 알기 쉬웠다는 뜻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맨발로 걸어 다니며 감상하는 경험에서 비롯된 친근함이다. 나의 경우 지금까지 감상했던 전시들은 전부 신발을 신었던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러나 본태 박물관에서는 바닥의 감촉을 느끼며 발소리를 듣고 작품 앞에 다가갈 수 있었다. 마치 집 안에서 친근하게 보는 듯한 뉘앙스가 전해져 작품과 나와의 심리적 거리가 평소보다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더 근본적인 이유를 짚어보자면 집 안에서 맨발로 다니는 것이 익숙한 동양권의 문화에 속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2층 동선의 안쪽 부분에서 왜 굳이 맨발을 의도했던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풀리고 방점을 찍어주는 지점이 등장하게 된다. 


처마를 길게 낸 덕에 자연광은 간접적으로 내부에 들어오게 된다.
매우 좁고 어둑한 길을 따라 빙글빙글 돌며 입장하게 된다


적막(寂莫)


두 번째로 감명 깊었던 포인트이다미로처럼 굽이지는 복도를 따라가다 보면 천창으로 빛이 들어오는 작은 기도실이 나를 맞이한다. 맨발로 의미 있는 장소에 경건히 들어가게 하려는 의도를 꾀하고 실현해낸 지점이 바로 이곳이다. 작은 크기의 유리창을 매개로 하늘과 나만이 맞닿는 적막한 경험이 순간에 깊게 새겨진다. 사람 한 명의 부피만큼 내어진 통로를 향해 고개를 들어 흘러가는 구름과 빛의 변화를 한 없이 바라보고 싶게 만든다. 그 어떤 공간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경험의 방이다. 그리고 밑의 사진은 ‘안도 다다오의 방’이다. 명상을 즐기는 안도 다다오를 위해 건축주가 특별히 마련한 배려의 공간이다.



시작 동선이 주는 신선함으로 출발하여 비교적 높은 지대에 위치한 5관에서 하늘을 보았고, 2관을 새로운 감상의 방식으로 경험했다. 마지막으로 1관이 남았다. 전체적인 동선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큰 흐름이다. 박물관이 설정해놓은 주제의식과 그 방향을 감상함에 있어 걸음이라는 과정이 새로움을 더한다. 풍경, 감각, 시선을 매번 다르게 부여해 나가는 건축가의 의도가 여실히 느껴지는 탐험적 공간의 가치가 귀중하다. 신선한 건축적 자극이 연속적으로 주어지기에 입장부터 퇴장까지 단 한순간도 시간을 허비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공간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가며 주어진 순간을 더욱 풍부하게 느끼는 건강한 시간이 되는 것이다.



장소: 본태박물관

연락처: 064-792-8108

주소: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산록남로 762번 길 69

시간: 매일 10:00 - 18:00 연중무휴 운영

홈페이지: bontemuseum.allthewa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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