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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명 Oct 10. 2021

삶에 맞닿은 차(茶)

취식과 의식의 현대적 해석, 델픽


푸른 하늘을 배경 삼은 북촌의 거리, 햇빛을 받는 건물의 그림자가 꽤나 선명한 날이다. 거주지인 과천으로부터 북촌까지 오는 길이 가깝지는 않다. 하지만 오늘의 교양이 되어줄 목적지로 향하는 길은 매번 새로운 여로가 되어준다. 독창성과 자유로운 철학만나는 일은 조금도 지루할 틈이 없다.



사람들이 밀집된 상권을 지나 조금 한적한 골목에 들어선다. 키 작은 주택과 개조된 한옥 사이로 한 건물의 모습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전통의 이미지를 갖는 북촌 속에서 혼자 다른 세계를 묵묵히 주장하는 듯한 파사드가 시선을 붙잡는다. (*파사드: 건물의 전면)



"We decide to be synchronized"


건물 앞 연못에 설치된 타이포그래피, 동시성 혹은 동기화를 의미하는 synchronize의 뜻을 미루어 보아 연결 및 공유의 가치를 전하는 공간 방향성을 추측해본다.


하늘을 반사시키는 글자들의 이미지는 걸음에 따라 모습을 달리한다. 수면에 투영된 나무 그림자와 자갈들은 편안한 시각성이 되어준다. 마치 한옥 앞에 연못이 있고 주위를 한가로이 거니는 모습을 현대적으로 표현해낸 듯하다. 위로 열린 공간과 빛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넓은 면적의 외부공간이 우리의 걸음과 시간을 여유로이 만들어준다. 전달되는 의도와 방문자의 감상이 부드럽게 만난다.



가로로 긴 건물의 입면을 따라 1층에 외벽을 덧붙였다. 차양의 목적으로 기능할 것이다. 넓은 단면적과 두께는 무게감을 더한다. 반면 바닥으로부터 떨어진 디자인 덕분에 부유감과 상승의 이미지를 갖게 된다. 또한 비워하단 부분으로 내부 공간이 일부 드러나게 되어 호기심을 자극다.




1층 내부는 전시공간으로 쓰인다. 잠시 둘러본 후 2층에 위치한 오늘의 목적지로 향한다.

바로 '델픽', 차(茶)를 다루는 공간이다. 컨셉의 의미와 이곳만의 공간적 언어를 탐구해보자.



가로의 가치


계단을 올라와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가로로 길게 뻗은 테이블과 그 뒤로 내어진 큰 유리창, 넓은 공간감을 은은하게 채우는 자연광의 분위기를 쉽게 인지할 수 있다.


여기서 가로라는 단어에 주목하게 된다. 우선 가로와 세로를 각각 수평과 수직에 대입해보자. 건축에서의 수직은 높이와 연관된다. 높이는 위계와 권력 등을 상징하는 경우가 있다. 고대 신전이나 제단의 높이와 그를 오르기 위한 수많은 계단, 도심의 건물이 갈수록 높아지는 이유, 고층 빌딩에 ceo룸이 위치하는 것 등 여러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위쪽 공간을 점유함으로써 지위를 확인한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은 인간의 소유욕에 근거한다.


반대로 수평은 높이와 멀어진다. 동등한 위치에너지를 갖는 상대 혹은 물체와 교류하기에 용이하다. 따라서 자유로운 연결과 소통을 위한 가치로 해석되기도 한다. 애플의 캘리포니아 사옥, 정부 세종청사의 디자인 등 같은 층에서 더 많은 인적 관계망을 형성하기 위한 시도들이 해당 사례가 된다. 위아래의 위계적 질서를 벗어난 배치인 것이다.


앞서 보았던 가로의 단면이 돋보였던 파사드, 연못을 따라 길게 걷는 동선, 사진에서 보이는 긴 테이블 위 배치된 기물들의 모습에서 일련의 공통점이 느껴진다. 층을 이동하는 경우에만 계단을 설치하고 같은 층 안에서는 높이에 의한 차별과 구분을 없앴다. 연결에 대한 방향이자 은유이다. 공간을 방문하는 사람들과 물건들이 같은 눈높이에서 평등한 관계를 이루길 바라는 건축적ㆍ디자인적 법이다.


정갈히 배치되어 전시·판매 중인 다기(茶器) 작품들


인간 삶의 역사를 브랜딩으로


유리창을 통해 한옥과 자연그대로 받아들이며 공간의 색(色)으로 활용한다. 앞에 놓인 전시대는 하나의 제단처럼 보이기도 한다. 위에 올려진 작품들의 외관과 배치가 마치 종교적 유물과 역사를 재현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도기가 갖는 지극히 동양적인 선과 정체성이다.


상호명인 '델픽(Delphic)'은 고대 그리스 시대 신탁이 이루어지던 장소를 뜻한다.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신에게 조언을 받는 행위를 모티브 삼았다. 그러한 삶의 염원과 자세들을 현대로 끌어와 삶의 가치를 돌아보는 하나의 방법론을 차(茶)라는 방식으로 제시한다. 깊은 철학적 성찰이 아니어도 된다. 잠시 생각을 멈추거나 지금 이 순간을 향유하는 과정들을 차 한잔에 담아보고, 이내 비울 수 있게 하는 공간적 배경을 마련해준.


차와 삶을 매개하는 다기(茶器)의 외형은 무형적 가치를 담는 실질적 틀이 다. 또한 고대의 삶에 대한 시선을 현대적 공간문화로 풀어내는 의도의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인간의 취식과 의식에 집중한 물건을 선택하고 배치했다. 동양의 정서와 역사의 시간이 공존하는 북촌에 위치한 것도 의도의 한 부분일까? 차와 일상을 맞닿게 하여 삶의 가치를 재고하게 만드는 고유하고 독창적인 브랜딩이다.




'ㄷ'자로 된 바 형태는 내 앞에 놓인 차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앉는 좌석의 위치와 바 사이의 거리가 가까운 탓에 상체를 앞쪽으로 기대어 앉기는 쉽지 않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단전이 위치하는 높이에 마신 찻잔을 조심스레 놓는다. 넓은 공간감이 홀로 앉아있는 나를 둘러싼다. 정적인 자세와 마음가짐을 취해본다.



검은색 철근이 테이블 위로 올라온 독특한 구조가 눈에 띈다. 천장과 벽면 그리고 기둥에서 보이는 거친 벽돌 마감의 질감은 차분한 공간에 변주를 더한다. 동양적인 자기들을 취급하면서도 서양적 형식의 인테리어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비율에서 확실히 현대적인 공간임을 알 수 있다.




건물의 옥상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면 한옥과 가까이 관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 높지 않다는 뜻이다. 동일한 지역 내에서 혼자 존재감을 내뿜거나 높은 키로 주변에서 돋보이려 하지 않는다. 다만 현대적인 외관을 단정히 갖추되 주변의 환경과 어울리며 새로운 영감을 전달하는 공간으로 존재한다.




백호은침


주문했던 차의 이름이다. 봄에 나는 새싹을 균일한 크기로 채취하여 만든 백차 종류로 하얀 솜털이 나 있는 모습이 마치 설산에 내린 봄의 생명력을 연상케 한다.


직원분께서 차를 우려내어주실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반대로 차와 다기만 준비해주시는 최소한의 서비스가 진행된다. 다도의 문화를 보다 가깝게 전파하기 위해 직접 우려 마셔보는 경험을 권장하는 것이다. 개인의 기호에 맞게 접근하는 차 문화라는 목적이다.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다소 아쉬움이 있다. 처음 겪어보는 경험이라면 우선 전문가의 손을 통해 겪어본 후에 본인의 취향을 접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러나 이곳의 의도를 이해하고 따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터, 안내받은 지침에 따라 차를 우려 본다. 은은한 향과 고소한 감칠맛이 입 안에 편안하게 머무른다. 내어주신 다과를 함께 음미하며 귀한 차를 마시는 새로운 경험을 완성해본다.



차를 마시며 사유한다. 그렇게 사유라는 차를 마신다. 지금의 잔을 비우고 그 다음 잔을 준비한다. 내 생각의 일부를 조명하고 작은 지혜를 얻는 과정이다. 여러분에게도 소중한 발견이 되는 경험이기를 바란다.



장소: 델픽(Delphic)

주소: 서울 종로구 계동길 84-3

시간: 매일 11:00 - 20:00

연락처: 02-742-9147


https://delphic.kr/

https://www.instagram.com/delphic_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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