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2학년으로 복학하기 전 맞이한 겨울의 어느 날, 부모님 대신 가게를 보던 중에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저예요. 000. 잘 지내시죠?"
중고등부까지 같은 교회를 다니다 이사를 가서 몇 년 동안 못 보던 친한 동생한테 전화가 왔다.
"와~ 반갑다. 잘 지내지? 갑자기 웬일이야?"
"나한테 2박 3일 스키캠프 티켓이 생겼는데 혹시 시간이 되면 같이 갈 수 있나 해서 전화했어요. 숙박부터 스키 대여료, 강습까지 모두 무료예요."
스키를 한 번도 타본 적은 없지만 복학하기 전 재미있는 일이 없어 심심하던 차 '무료'라는 말에 아무런 의심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전날, 부모님께 허락을 받고 2박 3일 치 짐을 가방에 한가득 담은 채 처음 스키를 타본다는 설렘을 가슴에 담고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밖에는 엄청난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갈 수 있겠니?"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으셨다.
"스키장으로 출발하기 전에도 지금처럼 계속 심하면 다시 집에 돌아올게요."
나는 그렇게 안심시키고 눈보라를 헤치며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만나기로 약속한 카페에 먼저 도착했고 몇 분 뒤에 아는 동생이 다른 친구와 함께 들어왔다. 오래간만에 보는지라 반갑게 인사하고 앉았는데, 동생과 그 친구는 가벼운 옷차림에 누가 봐도 스키장을 가는 복장은 아니었다. 그리고 서로 친구라면서 내가 아는 동생은 그 친구에게 계속 존댓말을 쓰는 게 아닌가. 뭔가 느낌이 이상하긴 했지만 워낙 남의 관계에는 관심이 없는 둔한 성격이다 보니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이제 밖으로 나가자고 하면서 동생이 말했다.
"미안한데, 오늘은 아무 말하지 말고 내가 하자는 대로 해주세요. 알았죠?"
"응, 그래..."
일단 대답을 하고 함께 카페에서 나왔다. 그러더니 버스를 타러 가는 게 아니라 4층 정도 되는 상가건물로 나를 데리고 갔다. 뭐~ 일단은 시키는 대로 따라갔다.
들어가서 2층으로 올라가니 학원 같은 느낌의 강의실들이 있고 그중 한 강의실로 나를 데리고 들어갔다. 나를 맨 앞자리에 앉힌 후 일단 강의를 들어보라고 하고선 자기들은 참관수업에 온 학부모처럼 뒤쪽에 가서 서는 게 아닌가. 근데 뒤에 참관수업 학부모 같은 자세로 서 있는 내 또래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파악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역시 내 또래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들어와 강의를 시작하였다.
듣다 보니 말로만 듣던 '다단계'였다. 좀 어이가 없고 스키장에 못 간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보다는 허무한 기분이 들었다. 뭐~ 그래도 강의 도중에 문을 박차고 나갈만한 배짱과 용기는 없기에 나름 열심히 강의를 듣기 시작하였다. 수업은 아침에 시작해서 점심 먹고 오후까지 이어졌다. 오래간만에 고등학교 수업을 듣는 기분이었다.
나같이 지인에게 속아 다단계에 와서 첫날 대판 싸웠지만 지금은 열심히 활동하고 있고 올해 첫 강의를 맡게 되었다고 감격하는 강사부터 머리부터 발 끝까지 명품처럼 보이는 옷으로 치장하고 나와 조금만 노력하면 "이사님"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대학생활을 할 수 있다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얘기하는 강사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나와서 강의를 하였다. 평소 접해볼 수 없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신기함에 열심히 수업을 들어서 그런지 20년이 지난 지금도 강사가 했던 농담부터 수업내용의 큰 틀까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첫 수업에 들어온 강사는 "A형은 화살촉처럼 생겨서 추진력이 있다. B형은 옆으로 보면 배를 내밀고 누워있는 모양이라 대체로 게으르다. O형은 둥글둥글해서 성격이 무난하다. 마지막으로 AB형은 A형과 B형이 섞여 있다 보니 추진력은 있는데 게으르다. 한마디로 좀 괴팍하다."라는 농담으로 수업을 시작하였다. 풉...... 내가 AB형이다. 내 성격이 괴팍한 이유를 이제 알았다...
그다음 회사의 조직도와 운영방법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졌다. 회사의 신입사원부터 간부급까지 무슨 보석 이름으로 불렀는데 다른 건 기억이 안 나고 이사는 다이아몬드였던 거 같다. 직급이 올라가려면 판매실적(자신이 구매한 금액까지 포함)으로 일정 포인트를 얻어야 하고 처음 직원이 되기 위해서는 300만 원에 해당하는 포인트가 필요하단다. 그리고 간부급부터는 일정기간이 지나면 포인트가 소멸되므로 기간 안에 다음 직급으로 올라갈 수 있는 포인트를 얻어야 한단다.
수학적 머리가 나름 잘 돌아가는 미래의 수학교사인 나는 듣는 순간 지금 화려하게 치장한 내 앞에 서있는 ‘이사’라는 여자도 결국 ‘빚 좋은 개살구’란 걸 알 수 있었다. 결국 인간의 허영심을 노린 사기일 뿐이었다.
수업 시작부터 끝날 때까지, 뒤에 서 있던 정직원(?)들은 우렁찬 목소리로 인사를 하고 농담을 듣고 박장대소를 한다. 끝나고 인사도 마찬가지다. 분위기를 자기들 쪽으로 끌고 와서 일단 수강생들을 정신 못 차리게 하려는 의도인 듯 뒤에서 엄청나게 바람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