뛰어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풍경이 있다. 러닝이라는 시퀀스의 마지막 신(scene)에 해당하는 장면이다. 한차례의 뜀걸음을 마무리하고 돌아가는 사람에게, 시공간의 색채는 평소보다 훨씬 생경해진다. 내가 최근 감상한 장면은 노을이 질 무렵의 소양강이었다. 단편적인 감상에 젖는 것만으로는 무척 아쉬워서, 나는 근처 벤치에 앉아 휴대폰의 메모 앱을 켰다. 흐르는 강의 속성을 발견해 내고 나의 하루를 투영해 본다면, 꽤나 괜찮은 사유를 끌어낼 수 있을 거란 믿음에서였다. 글을 쓰는 비결이 엉덩이 힘인 것은, 바깥에서나 방구석에서나 별다를 것이 없었다.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느끼게 된 것은 꽤 오래된 일이다. 10년 전과 똑같은 양을 먹는데도 소화가 느리고, 10년 전과 같은 시간을 자는데도 만성적으로 피로했다. 몇 개월 전부터 나는 운동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유산소 운동, 러닝이었다. 건강의 회복이 주 목적이었다. 건강 외에는 아무런 동기부여나 외부적 자극이 없었는데도, 필요를 넘어서서 거의 욕망했다. 어쩌면 '러닝의 즐거움'에 대한 동경을 아주 오래전부터 가져왔는지도 모른다. 파주의 gop에서도 그랬다. 입대 후 뜀걸음이 싫었던 기억은 거의 없었다. 몸에 열기가 달아오르고 숨이 차오를 때의 묘한 고양감, 바람을 가르고 있다는 감각과 시시각각 바뀌는 최전방의 풍경, 코스를 완주하고 뜀걸음 멈출 때 비로소 몰려드는 희열. 그것은 행복에 한없이 가까운 희열이었다.
나는 그 희열을 잊지 않고 내밀히 간직하고 있다가, 최근 오래 바라오던 대로 뛰기 시작했다. 양말과 러닝복 상하의를 세트로 샀고, 적당한 브랜드의 러닝화도 구했다. 코스는 만천천 산책로였다. 살고 있는 빌라에서 도보로 5분 정도의 거리였다. 이름 그대로 춘천의 만천리에서 발원된 하천이었다. 만천천은 산책로를 따라 소박하게 흐르다가, 끝내는 드넓은 소양강으로 합쳐졌다. 코스의 끝자락에서 나는 언제나 소양강과 만날 수 있었다. 매번 황혼이 드리워져있는 모습이었다.
강에서 실려온 초저녁 바람은 딱 기분 좋을 정도로 서늘했다. 땀이 개운하게 증발하는 것을 느끼면서, 나는 텅 빈 메모장과 소양강을 천천히 번갈아 바라봤다. 강의 물결을 '비늘'에 빗대었던 어느 소설가가 떠올랐다. 어떻게 그런 기가 막힌 비유를 떠올려냈을까 싶었다. 지는 해를 배경으로 소양강은 고즈넉하게 흐르고 있었고, 물결의 비늘들이 살구빛 노을을 너울거리며 반사해 내고 있었다. 그때 문득 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산책로와 강의 경계에 심어져 있었고, 그루터기가 강물에 약간 잠긴 모습이었다. 나무는 자신의 잎들이 저녁 바람에 흔들리도록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다. 잎의 흔들림 너머로 흐르는 강이 다시 보였다. 나는 즉시 시선을 거두고 메모하기 시작했다.
"강은 흐른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나무와 동일한 유기체인 것처럼. 나는 그 흐름에 포함된 생명을 나도 모르게 느껴버리고 마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착각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흐른다는 현상을 '살아있음'으로 착각해버리는 것은 어째서일까. 자연은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모종의 물리법칙에 따라 가끔 움직임을 보이거나 대부분의 시간 동안은 그대로 멈춰 있을 뿐이었다. 인간은 언제나 철저히 인간의 관점에서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다. 자주 감상적인 착각에 빠지고 스스로 도취된다. 우리는 모두 비슷한 존재다. 그러니까 어쩌면 자연이 선사하는 풍류를 마음 놓고 즐기는 일은 그리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삶을 다시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은 대부분 그러한 착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왠지 그날은 한 걸음 더 내딛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착각을 착각인 채로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추상적인 감상을 어떻게든 더듬어 삶의 의미와 결부시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메시지를 발굴해 내고 낱말과 문장으로 시각화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더 이상 이 착각은 나에게만 머물다가 사라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하나의 생동감 있는 이야기가 되어, 언젠가는 타인에게도 닿을 수 있게 될 터였다. 나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소양강의 황혼을 계속 지켜봤다. 해가 산 너머로 거의 사라지고 있었다. 쪽빛 어둠이 내려앉았고, 산책을 위해 밖을 나선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노을은 이제 끝물이었다. 나는 간신히 어떤 생각에 닿았다. 최근 내가 선택하고 있는 삶의 방식에 대한 단상이었다. 나는 홀린 듯이 메모하고 몸을 일으켰다. 땀이 거의 다 식었다. 더 늦어지면 돌아가는 길이 싸늘할 것 같았다.
" 강이 흐르며 노을빛을 반사해 내는 것처럼, 나도 영원히 흐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 흐른다는 것은 나의 내면이 바라는 일들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삶 속에 녹여내고 실천하는 모습일 것이다. 흐르지 않는 강은 더 이상 강이 아니라 웅덩이다. 그저 가만히 노을에 붉게 물들 뿐이다. 그러나 흐르는 강은 다르다. 자신을 물들인 노을을, 온몸으로 표현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