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대형서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어디서 출발한 것인지 떠올려봤다. 익숙함으로부터의 탈출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디론가 떠나서, 모종의 영감을 얻고 싶었다. 일터 근처의 동네로 새롭게 이사한 지한 달이 조금 넘었다. 고작 한 달이 넘은 것뿐인데, 벌써부터 거리의 모습들이 새롭지 않다. 날씨가 화창한 날 산책로를 걸을 때의 설렘도 한 달 전 같지 않고, 러닝 코스에포함되어 있는 소양강의 풍경도 한 달전처럼 감동적이지 않다. 사람이란 이렇게 빠르게 적응하는 동물인가 싶었다. 물론 여전히 가보지 못한 식당, 골목, 카페들이 주변에 즐비해있을 터였다. 아주 조금만 신경을 기울이면 근처에서도 새로운 경험들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더 많은 교통비와 시간이 소요되는 서울을 택했다. 그건 분명 깊은 생각을 기울이는 것이 번거로웠던 탓이겠다. 지방 사람들에게 대표적인 나들이 명소는 서울이다. 대중매체 어디서든 등장하는 도시, 그래서 마치 대한민국엔 서울밖에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도시,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는 결코 일상일 수 없는 도시다.
서울에 간다. 대형서점에 가서 영감을 얻고 돌아온다. 조금 시간이 소요될 순 있어도 실패할 확률이 적은 계획이다. 깊은 생각이 필요하지 않은 계획이다. 어쩌면 나의 무의식 중에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맹목적 갈망이 심어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것이 마냥 싫지는 않다. 실제로 대한민국에서만큼은, 모든 분야의 정점을 체험할 수 있는 도시다. 서울에 대한 동경이 고쳐야 할 생각이라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최소한 이 무의식의 원인을 자각하고 있을 필요성은 있겠다. 그곳에 최상의 것들이 모여있다고 해서, 춘천에서의 경험들이 하찮거나 무가치한 것은 결코 아니기에. 나는 다만 단 하루에 불과하더라도 작은 여행이 필요했을 뿐이다. 새로운 거리와 새로운 풍경, 새로운 느낌의 타인들과 덧없이 스쳐 지나가는 경험이 필요했을 뿐이다.
나는 잠을 조금 줄이더라도 서둘러 일어나기로 했다. 빨리 출발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여유 있게 떠나기 위해서였다. 급하게 씻거나, 급하게 입고 챙기거나, 급하게 먹는 것이 싫었다. 나의 속도대로 떠남을 준비하고 싶었다. '떠나는 자신'의 편안함과 자유가 가장 우선이 되어야지, '떠남 그 자체'에 얽매여서는 안 될 일이었다. 혼자 떠나는 이유는 온전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였다. 나 자신과의 관계에도 어느 정도 느슨함을 줄 필요가 있었다. 굳이 여행이 아니더라도 요즘 가장 신경 쓰고 있는 부분이기도 했다. 내가 자신을 표독스럽게 보채고 밀치는 일을, 나는 매일같이 경계하고 있다.
이동 수단으로 경춘선을 고른 것 또한 비슷한 맥락에서였던 것 같다. 전철은 어딘가 고요하고 여유로운 감성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버스에선 일상인 과속방지턱, 급속한 좌회전이나 우회전, 혹은 난폭운전도 전철에서는 체감하기가 어렵다. 특유의 기분 좋은 백색소음을 내며 승객들을 담백하게 실어 나를 뿐이다. 새로운 시공간으로 몸과 정신을 옮겨 다니는 것이 여행의 본질이라면, 경춘선을 타고 왕복하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나에겐 충분한 여행이 되었다. 서울에 가면서는 책을 읽었고, 춘천으로 돌아오는 길엔 글을 썼다. 어느 때보다 몰입해서 읽었다. 어느 때보다 몰입해서 썼다.
광화문의 어느 카페에서
몇 차례 환승한 끝에 광화문역 1번 출구로 나왔다. 간단하게 우동으로 끼니를 때우고 커피를 마셨다. 선택한 대형서점은 광화문의 교보문고였다. 넓은 공간도 공간이지만, 아직까지 이렇게나 책을 보러 오는 사람이 많구나 싶은 생각에 새삼 기뻐졌다. 출판시장의 어려움이라거나, 독서를 멀리하는 현대인 풍조에 대해서 자주 들어왔던 터였다. 한때는, 마치 책이라는 매체 자체가 절멸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었다. 물론 덧없는 불안이었겠다. 책은 결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다만 전달되는 방식이 현대에 맞게 바뀔 뿐이니까. 전자책이나 오디오북이 상용화되고 있다. 보다 다양한 형태의 구독 플랫폼들이 서비스되고 있다. 사람들은 시대를 불문하고 활자화된 정보를 원할 수밖에 없다. 오직 인간만이 활자로 소통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점의 '종이로 된 책'을 보러 오는 사람들의 모습은 무척 반갑다. 뭐랄까, 아날로그 시대에 살짝 발을 담가본 세대로서의 향수랄까. 책들은 분야별로 섬을 이루고 있고, 사람들은 원하는 섬에 각자의 배를 정박한 채로 읽는다. 거기엔 아무런 분쟁이나 소란이 없다. 오직 개개인의 온전한 추구만이 있을 뿐이다. 시와 소설에 대한 추구, 인문학에 대한 추구, 어떤 위대한 사람에 대한 추구, 우주의 원리에 대한 추구, 사랑과 삶에 대한 추구. 나는 어쩌면 영감을 얻기 위해 서점에 왔다기보다, 오히려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이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들의 일부임을 느끼고 모종의 소속감을 얻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춘천에서의 삶은 안온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고독하고 지난했다. 매일 조금씩 미래를 준비하고 있지만, 그 속도가 터무니없이 더디게만 느껴져서 자주 막막해졌었다. 무언가 원대한 계획을 세우고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더 치밀하고 더 치열하게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 질문들이 나를 노려볼 때마다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격려해 주고 믿어주는 타인이란 꿈에 불과한 것이었다. 가족에게는 도저히 꺼낼 수 없는 주제의 이야기였고, 친구들과의 통화에서는 언제나 가벼운 대화들만 오갔다. 모든 불안이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내가,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 나를 꾸역꾸역 격려하며 살아내야만 했다.
독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끈을 놓지 않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아무리 어려도, 아무리 늙어도, 아무리 가난해도, 아무리 어설퍼도, 아무리 하루가 전쟁 같아도, 아무리 이룬 것이 없어도 다만 읽는 일. 읽는다는 행위 자체에 어떤 의미나 삶의 단서가 있을 것이라 막연하게 믿으며 절실하게 페이지를 넘기는 일. 만약 지금 누군가가 읽고 있다면, 그는 아직 삶을 놓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아직 자신을 포기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서점에 운집한 사람들은 모습은, 내겐 마치 포기하지 않은 삶들의 연대처럼 느껴졌었던 것 같다. 나는 군중들 사이에서 책을 고르고, 멈춰 서서 읽고, 간혹 생각에 잠김으로써 조용히 그 연대에 참여했다. 그들은 나를 아무런 대가 없이 받아주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전철에서, 나는 이 글의 대부분을 써냈다. 하고 싶은 말들을 중구난방 하게 풀어놓은 느낌이지만, 가감 없이 온전히 올려본다. 완결성을 가지기 위해 거짓을 보태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다. 삶의 확신과 영감을 얻기 위해 떠난 기록들이다. 때로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