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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로나 Oct 15. 2020

떼인 미수금 받아 드립니다

약자에게 참 강했던 사람들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하게 대하자는 것이 나의 삶의 모토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나는 굉장히 소심하고 불의를 봐도 우선 한 템포 늦게 발을 떼는 부류의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도 어떻게 사는 것이 정의 있고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 머리와 마음 곳곳에 아로새기려 하는 것은 어찌 됐든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고 있고, 생각의 깊이와 넓이가 엇비슷한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을 거다.


내 기억 속에서 약자에게 참 강했던 사람이 몇몇 있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여자이고,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을 나왔고, 나의 상사였던 사람들이다. 다들 잘들 살고 계시죠? ^^




몇십 년의 경력이 있는 회계팀 차장님도 처리하지 못하는 일을 팀의 막내인 나에게 던져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실제로 회계 부서도 아닌데 그저 우리 팀의 거래처라는 이유로 직접 미수금을 받아내라는 임무가 나에게 주어졌다. 떠넘겨졌다. 던져졌다. 아니, 내가 밟았다 그 똥을.


그때는 그게 부당하고 어이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몰랐고, 그저 난 우리 팀에서 가장 어리고, 학벌이나 경력 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있으니 그저 묵묵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실적 평가에서도 그런 일을 담당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도 정말이지 나는 몰랐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갔다가 결국 나에게 떨어진 일이었을 거라는 답이 나온다. 다른 사람들은 강하게 반발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내가 왜 이 일을 하냐. 실제 업무와 연관성도 없고, 다 안 한다고 하는 일을 왜 내가 하냐 어쩌고 저쩌고... 뭐 그랬을 것이 뻔하다.

내가 그 일을 처리하지 못해 매일 식은땀을 흘리고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것을 팀원들이 다 알고도 묵인했다는 것도 이제야 알겠다. 어느 누구도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을 때 관련 이야기를 나에게 건넨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 소름 끼친다. 나는 매일 퇴근길에 친한 친구에게 털어놓고 속상해했던 기억만 있을 뿐. 이제야 그때의 퍼즐이 딱딱 맞춰지는구나.


'떼인 돈 받아 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출근길 지하철에서 가끔 보이면, 저거 굉장히 스트레스 심한 일인데, 나도 지금 하고 있는데... 저 일을 하러 출근을 하잖아... 하며 무겁고 원치 않는 발걸음을 겨우 달래서 출근했던 기억도 난다. 나는 '떼인 미수금 받아 드립니다' 라도 내걸어야 할 판이라면서.



출근을 하면 팀장의 메일이 온다. "000 씨랑 통화했나요?"

난 답장을 써야 하니까 거래처에 전화를 건다. 조용한 사무실의 나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평소엔 존재감도 없는 팀의 막내인데), 상대방은 정말 내 목소리가 안 들리는 건지, 듣기 싫은 건지, 피하고 싶은 건지. 자꾸 큰 소리로 똑같은 이야기를 하게 만든다. 본인이 의뢰한 일을 다 해줬는데 왜 돈을 안 주는 것일까? 돈 안 주고 버티고 있는데 전화 오는 사람은 젊은 여자고, 듣자 하니 말도 어버버 하니 더 버텨도 되겠다 싶었을 것이다.

답장을 쓴다. 대답 못 들었다고.


결론은 난 떼인 미수금을 받지 못했다. 그 미수금은 팀장이 받아냈다.

내가 매일 전화하고, 그 사람 성질, 억지를 다 받아주고, 매일 똑같은 히스토리 설명하면서 며칠을 보냈는데,

결국 팀장이 그 사람이랑 통화했고 (팀장도 그 사람과의 통화를 엄청 힘들어했다) 결국은 그 사람이 돈 보냈단다. 그럼 처음부터 니들  윗분들이 했어야 되는 거 아닌가?


그럼 이 일의 실적은 누구에게 돌아가는 걸까? 팀장? 나? 회계팀 차장님?

궁금하다. 나에게도 조금은 실적을 나누어줬을까?

내 기억엔 그 일이 마무리되고 어떠한 코멘트도 팀장에게 들었던 것이 없다.

나도 그저 더 이상 전화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 보려 했었고.


팀장님! 차장님! 두 분은 떼인 미수금 받으셨지만, 저는 아직 떼인 실적 처리를 못 받았어요.

그 일 저도 했어요. 약자들도 지분이 있다구요오오~ 


제발 지금은 약자들도 돌아보는 삶을 살고 있길 바랄게요.

과연..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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