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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로나 Sep 30. 2021

어젯밤, 어떤 패배자

"그거 읽어달라고?"

"아니! 마마펜으로 하려고. 근데 마마펜 어디 있지???"

다민이가 ORT 몇 권을 꺼내면서 마마펜을 찾는다. 혼자 펜으로 찍으면서 영어책을 읽으려고 했나 보다. 난 왜 그 시점에 화가 났을까. 아직도 알 수가 없다. 문제 될 만한 건 없었다. 저녁도 다 먹었고, 아이들도 다 씻겼고, DVD도 다 봤고. 오히려 평소보다 평온했던 저녁이었다. 그런데 마마펜 어디 있냐는 한 마디에 불같이 화를 내버렸다.

"또 어디 있는지 몰라?"

"....................."

"얼른 찾아. 채민! 너도 같이 찾아 빨리!"

매번 톡톡펜은 어디 있냐. 세이펜은 어디 있냐. 마마펜까지.. 없다고 엄마한테 말하면 뚝딱! 하고 나오는 줄 아는지, 안 보이면 엄마부터 찾는 녀석들이다. 오늘은 꼭 직접 찾아보게 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찾는 것도 대충대충. 찾다가 딴짓하고. 왜 우리만 찾아야 하냐는 어이없는 소리도 하고.

점점 화가 오르기 시작했다. 멈춰야 했다. 그냥 없으면 없는 대로 오늘은 그냥 읽자고 하면 되는 거였다. 그런데 정말이지 멈춰지지가 않았다. 아이들에게 계속 빨리 찾으라고 재촉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ㅠㅠ.

"놀이방 장난감 통도 다 찾아봤어?"

"응. 근데 없어;;; "

"찾고 나서 자는 거야. 오늘은 늦게 자도 어쩔 수 없어"

"......................."

놀이방에 가서 인형 몇 개를 들추었더니 마마펜이 들어있다. 매번 그랬다. 색연필, 가위, 공책.. 등이 장난감 통에 뒹군다. 아마도 책 보다가, 그림 그리다가 블록도 쌓고, 인형놀이도 하니까 한데 섞여 있을 수도 있는 거였다. 그런데 왜 도대체 거기서 또 폭발했을까. 아직도 정말 모르겠다;;

"여기 있잖아!!!!! 놀이방에!!!!!"

"어....아까는 없었는데;"

"이제 여기 있는 거 다 버리자. 유치원에서 선생님이 주는 만들기도 받아오지 마. 선생님. 저는 집에 가져가면 정리 못하고 찾지도 못해서요. 안 가져갈게요....라고 말해. 알았지?"

추석 때 친척 언니에게 받은 보드게임도 상자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다 어디로 사라졌냐고.!!

얼마 전에 고모에게 선물 받은 (난 사주지 않는) 주방 놀이도 다 뿔뿔이 흩어져 있다. 화가 난다. 그냥 다 싫다.

7살, 5살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라곤 '다 버리자' 뿐이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엄마를 바라보고 있는 두 아이를 외면했다.

진짜 못났다. 패배감에 견딜 수가 없었다. 책을 읽어서 뭐 하고, 글을 쓴다고 폼만 잡고 있으면 뭐해. 명상록을 필사를 하면 뭐 하냐고. 다 부질없다. 아이들 앞에서 무너지면 모든 게 의미가 없다. 그게 제일 속상하고 아프다. 아이들과 많이 웃을 때, 서로 얼굴을 보며 이야기할 때, 먼 우주에 있던 천사가 엄마 뱃속을 찾아 들어왔다고 말할 때, 무탈하게 하루가 가고, 매일 만지는 손과 발을 보며 코 끝이 찡할 때,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나라는 걸 기억해야지.

루틴을 게을리했을 때도 이런 패배감은 없었다. 하지만 육아가 잘되지 않은 하루는 패배자가 된 기분이다.

아이들 때문이 아니라 아이들 덕분에 더 멋진 엄마가 되고 싶어 졌다는 걸 잊지 말아야지.

하기 싫은 마음도 다 내가 만들어 낸 감정이라는 걸 꼭!!! 새겨놓자고.

반성하면서 책장 정리를 했다. 개똥이네 들어가서 중고 전집도 주문했다.

아까 사다 놓은 포도도 씻어두고, 고구마도 삶아야겠다.

그리고 오늘은 묵언 수행하는 기분으로 지내야겠다.

입을 닫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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