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이시키는대로 하는 일
예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마음들이 요즘들어 종종 마음을 일렁이게 할 때가 있다.
20대에는 나중에, 다음에, 언제한번이라는 마음으로 하고 싶던 일들을 미루고 내 앞에 당장 닥친 일들을 해결하는 것에 급급했었다.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했었고, 딱히 탈출구가 없었던 것도 맞다.
20대에는 친구들과 영화도 보고싶고, 여행도 가고 싶고, 설레이며 연애도 시작해보는 그런 나이인데 아, 물론 배우고 싶었던 것들이 있다면 그때가 적기라는 생각도 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일찍 생업 전선에 뛰어든 나는 무언가를 두고 후회라는 것을 할 수가 없는 선택을 했었다. 집안을 책임져야 하는 생계를 위한 일이 아닌 나는, 내가 살고자 숨을 쉬고자 선택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물론 오기도 있었다. 방송가라는 곳에 처음 발을 들이니, 선배들은 하나같이 " 이번에는 얼마나 버티려나...?" 라며 자기네들끼리 내기라도 하듯 입을 모았기 때문이다. 첫 월급으로 80만원에서 3.3프로 세금을 뗀 금액을 받았다. 그 돈으로 나는 여행가방으로 쓰는 트렁크를 하나 구입했다. 지금도 잊혀지지않는 나의 첫 생계프로젝트를 위한 트렁크였다. 배낭여행을 갈 때나, 친구들과 여행을 갈 때 많이 쓰이겠지 하는 생각?! 노노!
나는 방송국을 드나들기 위해 큰 트렁크를 장만했고, 팀을 옮길 때 마다 그 트렁크는 나와 혼연일체가 되었다.
집에 들어가는 날들이 줄어들었고, 밖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것에 익숙해졌다. 일을 하다보면 늦어지기 일쑤였고 그 시간에 막차를 타고 갔다가 새벽에 나오는 일이란 막내라는 직급에 여간 힘든 일이 아니어서 나는 방송국에서의 노숙을 택했고 그 모습은 선배들에게 독종으로 각인되었다. 그저 그냥 집에 왔다갔다 하는 시간에 눈이라도 한번 더 붙여야지 했던 마음이었는데 말이다.
사랑하는 사이에도 권태기라는 것이 있듯이, 나는 내가 사랑했던 일하고 권태기를 겪어야 했다.
방송작가라는 일을 두고 사람들은 우아하게 커피를 내려 마시며 책을 뒤적거리고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만 두드리면 되는 그야말로 놀고 먹는 직업이 아니냐고 했었다. 심지어 책을 쓰는 작가들은 들어봤어도 방송작가라는 말은 그 당시 생소하다고 했던 사람들이 부지기 수였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직업에 회의감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쓸 때에도, 병원을 오가며 취재를 하면서도 나는 솔직히 출연자들의 상황에 내 감정 이입이 되지 않아 힘들었던 일들이 많았다. 온전히 마음으로 대할 수 없고 그 사람들에게 취재라는 것을 한다는 일이 좀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0024시를 할 때의 일이었다. 자녀들을 다 키워놓고 이제야 좀 편히 살아보려나 하는 순간에 부인이 뇌출혈로 6개월째 사경을 헤메는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아들이 교통사고로 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아저씨의 이야기는 십여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좋은 기억일수야 없는 이야기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나 씁쓸했던 기억이다.
그때 나는, 글을 쓰는 작가가 아닌 글을 쓸 수 있는 재료들을 수집하는 취재를 위해 그 아저씨를 일주일이 넘게 매일 찾아 뵈었다. 처음 며칠은 얼굴도 마주하지 않고 물어보는 질문에도 그렇게 퉁명스러울 수 없었는데 3일째인가 그 아저씨가 먼저 연락을 해 오셨다. 그러더니 자판기에서 따뜻한 율무차 한잔을 뽑아 먼저 건네주시며 내 개인적인 부분에 대해 물어보셨다. 왜 작가일을 하고, 왜 이런 프로그램을 하게 되었는지부터해서 부모님은 무얼 하시는지 나이는 어찌되는지, 형제지간은? 등등 신상조사를 하셨고 아저씨는 아들하나 딸하나를 둔 그냥 일용직 노동을 하는 가장이라고 하셨다.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되어 장소를 옮겨 병원 근처 백반 집에서 점심을 같이 먹고 나니,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이렇게 말씀이 많으실까...!
곤란하다는 것을 알지만 부탁이 있다며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시던 그 아저씨. 출연료 이야기를 하셨다.
물론, 보통은 출연료 이야기도 많이들 하신다. 얼마를 받을 수 있냐부터 왜 이리 적냐 등등 많은 이야기를 돈을 지급하는 회사측이 아닌 그냥 글쓰는 직원인 나에게 참 많이도 하셨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인지 빚쟁이 인지 헷갈릴 정도였으니까.
병신 되서 누워있는 식구 둘이나 찍어가니 알아서 좀 챙겨달라며 툭 말을 던지고는 잽싸게 일어나 병원으로 들어가시던 그 모습이 나는 아직도 생생하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담당 피디에게 전화를 걸었던 기억이 있다. 나도 너무 웃긴건 두사람 출연료 나갈 수 있냐고 물어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부인을, 자식을 병신되서 누워있다고? 이야기 하며 두사람 출연료를 운운하는 저 사람이 남편인가? 아버지인가? 그래서? 그 돈이 나온다고 하면 쓰려고? 어디 병원비에라도 보탤만큼 많이 좀 달라는 뜻인가? 어안이 벙벙했었다.
그때 나는, 아..내가 이 일을 계속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간혹 어떤 출연자들은 출연료는 필요없으니 어디 더 어려운 사람들 위해 써달라는 분들이 있다. 그런 분들의 대부분은 아버지, 할아버지 라는 이름을 가진 분들이셨는데 돈 얘기 꺼내려고 밥 먹자고, 차 한잔 하자고 그러셨구나 싶고 내가 글을 쓰고 싶었지 이런 일들로 감정 소비를 하자고 이 일을 시작한건 아니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달 쯤 촬영을 했고, 2 주간의 편집 작업을 하는 동안 아저씨의 부인 되시는 분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다음주가 방송인데 검은 바탕에 쓸 자막도 내 손으로 쓰고 있어야 하니 나는 어쩐지 내가 그 아주머니를 사지로 몬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는 자막을 쓰며 진심으로 회의감이 밀려왔다. 일주일간 휴가를 달라고 선배한테 사정을 했다. 바쁜 와중에 휴가같은 소리 한다고 했지만 그러지 않으실거면 그냥 사표를 쓰겠다고 했더니
억지로 휴가를 내어 주셨다. 휴가를 받은 그 와중에도 나는 다음 취재 할 내용을 보고 있었고, 휴가 4일째 되는 날 스스로 복귀를 했다.
그리고 선배한테 프로그램을 바꿔달라고 강제 요구를 했고, 그러지않고는 글쓰는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더니 선배는 두말없이 나를 그 비슷한 옆집 프로그램으로 옮겨 주었다.
00의 리퀘스트. 어쩔 수 없는 운명 같은 나는,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하며 1년을 더 그렇게 회의감과 보람 사이에서 왔다갔다 하며 작가의 수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치열하게 살았다. 살아남기 위해 살았던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살았다.
아버지의 언어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고, 집안에 웃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공간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고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아버지라는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다.
벗어나기 위해 살아야 했다. 속으로 삼킨 말들을 글이라도 써서 토해내야 했고, 아이러니하게도 글을 쓴다는 나의 감정은 점점 메말라 갔었다.
늘 불안했고, 눈치를 봐야했고, 긴장해야 했던 내 삶에 평온은 없었다.
그나마 나는 글을 쓸때 온전히 나로 살 수 있었다. 글 안에는 내가 있었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살아야 했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지금을 산다.
앞으로도 나는 후회하지 않는 나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