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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별여행자 Mar 22. 2021

진정한 훈육은 무엇일까

어른으로그리고아이로

불편한 것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 참아 낼 때 그것이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을 안다. 

하고 싶은 말을 꾹꾹 눌러담을 줄도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사실 그것이 주는 만가지의 스트레스로 인해 곪아간다는 것도 어느 쯤은 인지하고 있는 우리들이다. 나부터도 그랬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망나니마냥 하고싶은 말을 다 쏟아내고, 내가 편하고자 하는 행동들을 해가면서 나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타인의 시선과 비난, 비판으로부터 단단해지는 방법도 스스로 터득해야 했을 만큼 바깥세상은 냉혹했다. 

그도 그럴것이 우리는 처음 도덕이라는 사회라는 교과목을 배우면서부터도 하지말아야할 행동과 말, 해야하는 행동과 말을 구분해서 학습한 덕분이었다. 그렇게 학습이 되고 훈련이 된 덕에 질서를 지키고 도덕을 중시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보여지는 사회생활과 사람을 대하는 모습과는 달리 내면에서는 선을 긋고 벽을 쳐가면서 내가 가까이 하고싶은 사람들에게만 마음을 열고, 내가 편하고자하는 행동을하며 그렇게 말을 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게 살아간다. 종교적인 특정 이유가 아니고서는 늘 바른생활이어야 한다는 것은 개나 줘버려! 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아이의 팔에 크게 멍이 들어 왔다.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친구와 사탕으로 옥신각신하다 꼬집혔다는 것이다. 

남자아이이기도 하고 덩치도 우리아이보다 크고, 그녀석은 3월생 우리아이는 11월생이다보니 개월수 차이도 있겠거니와 밖에서는 어떤지 세상 순둥이같은 아이라 두어번 당하고 왔을 때도 속이 터졌었다. 

그냥 꼬집어서 흔적도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이건 어디 크게 넘어져 멍이 든 것 마냥 퍼렇다못해 범위도 꽤 넓었다.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며 순간 화가 부글했는데 이걸 어찌 해야하나 생각하다가 주말임을 무릅쓰고 선생님께 문자를 드리고 사진도 찍어 보내드렸다.  지우가 학교에서 시완이와 다툰것 같은데 꼬집어 멍이 심하게 들었다고, 선생님께서 두 아이를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봐주시고 주의를 주셨으면 한다는 최대한 감정을 절제한 문자를 하고는 화를 가라앉혔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이 투닥거리고 학교생활을 하다보면 때리기도하고 꼬집기도하고 그럴수도 있지. 하지만 저렇게 팔이 시퍼렇게 될 정도로 친구를 꼬집어야 했을 일일까. 아이에게 주의를 주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요즘 사회가 그렇다보니 남의 집 아이를 무조건 혼내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나는, 무조건 내 아이가 잘했다는 생각은 없다. 문제가 생겼다면 분명 두 아이의 충돌이 있었기 때문이고 어느 한쪽의 양보가 없이 신경전을 했다는 결과이기 때문에 한참 배워가는 아이들에게 무조건 너의 잘못이다를 가르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다. 늘 그랬다. 어린이집을 다닐 때에도 할머니손에 자라면서 어린나이에 맞고 자라는 녀석에게 장난감으로 맞고 왔을 때에도 오히려 그 아이를 잘 다독여달라고 했었고, 작년 5학년 뚱보언니에게 '나를 두고 다른 언니를 더 좋아하면 너는 중학교가서 일진한테 죽도록 맞어' 라고 협박을 들었을때에도 우리 아이한테 어떻게 그럴수 있냐가 아닌 상대 아이를 좋은 말로 타일러주십사 부탁을 하게 됐었다. 

어쩌면 엄마인 나도 요즘 시대에 맞춰 훈육의 방법이 학습되어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릴때 동생들과 싸워도 무조건 더 많이 그리고 더 세게 맞아야 했다. 매 맞는 차례도 늘 1번이었고 마지막까지 맞는것도 꼭 첫째인 나였다. 엄마는 빗자루를 한번 들면 스스로 마음이 진정될 때까지 닥치는대로 때렸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거라고 생각했던 것인지 너무 어려 아무 힘이 없어 막을 수 없었던 탓인지...지금 생각하면 정말 그렇게 맞고 왜 한번도 왜 때리냐고 해본적이 없으니 답답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피하다가 손등의 뼈를 맞는 날은 그냥 하늘이 노래지는 그런 날이었다는 아픈기억이 가끔 아지랑이가 피어나듯 기억 저편에서 밀고 올라온다. 


훈육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자신의 자아를 완성해가기 까지 곁에서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기 위해서는 당근과 채찍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도 아이에게 훈육을 위한 매질은 그건 온전한 가르침의 이유가 아닌 폭력이라는 것도 맞다는 생각이다. 


완벽할 수있을까. 어른이라고 해서 인생을 더 살고 있다는 이유가 나 자신이 혹은 어른이라는 그 누군가가 완벽한 인격체라고 아이들에게 미성숙을 운운하며 훈육 목적의 폭력을 가할 수 있을까. 

교육은 늘 어렵다. 그래서 교육자들은 늘 인내하고 참아가며 자신을 갈고 닦아 타인에게 그 가르침을 주는 것일 것이다. 한 아이가 자라나기 위해서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도 과언은 아니겠지. 

어른들의 잘못된 인식이 훗날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발목잡는 그런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훈육의 방법도 그래서 바뀌어야 할 것이고, 아이로부터든 어른으로부터든 폭력은 없어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 지우가 시완이와 화해를 하고 두 아이가 조금 더 성장해 있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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