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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적 죄책감

by 시간 끝에서 온 빛

화재를 진압하다가 순직하는 소방공무원보다 자살하는 소방공무원이 더 많다. 이를 아는 사람들은 몇 없고 뉴스에서 나오는 주제가 아니다. 늘 그래왔듯이 이러한 가장 중요한 문제가 가장 외면받는다. 세계와 전 국가적으로 저 깊숙이 빙하의 수면밑에 잠긴 수면 위로 보이는 부분보다 수백수천 배는 더 큰 밑부분의 빙하처럼 방대한 양의 무의식적 죄책감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오히려 회피하고 우울증 약으로 처방하고 그것으로 우울증을 회피한다.

우울증은 심리상담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여러 가지 논리적 이유를 대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무의식적 죄책감을 회피하는 것은 무의식적 죄책감을 '보호'하는 것이다. 무의식적 죄책감을 들여다보지 않는 일은 방안에 들여둔 쓰레기를 내보내지 않고 보호하는 일이다.


이러한 무의식적 죄책감을 ego라고 한다. 여러 가지 형태로 세상에 나타나는 하나의 ego는 인간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두려움 짜증 남 분노의 여러 가지로 분리된 것은 다 하나의 ego이다. 지금 당신이 평화롭지 않다면 행복하지 않다면 당신이 여태해왔던 모든 방법들은 실패한 것이다.

가장 중요한 당신이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다.


ego를 소거하는 방법은 너무도 쉽다. 불교용어로 업보를 청산한다고 말하기도 하며 힌두교 용어로는 카르마를 다르마로 바꾸는 일이다.

그건 용서인데 이때 용서란 뉴턴식 용서가 아니다. 뉴턴식 용서란 남이 내게 한 짓에 대해 그 일어난 일에 대해서 봐줄게^^하는 식의 용서다. 다른 사람이 내게 저지른 짓들을

눈감고 넘겨주는 행위를 말한다. 허나 ego를 소거하는 방법은 우리가 흔히들 아는 뉴턴식 용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한 짓은 애초에 일어난 적도 없었음을 확실히 인지하는 것이 용서이다. 내 외부에는 아무도 없기에 그 누가 내게 해를 가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것이 진실이다. 영화 속에서 A가 B에게 뺨을 때린 들 그건 그냥 허구이다. 이 세상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은 내 마음속 투영일 뿐이지 진실이 아니다. 이걸 정확히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그리도 오랫동안 추앙받고 있는 예수와 붓다이다. 그들은 이 세상이 투영임을 깨닫고 꿈속에서 빠져나왔다.


프로이트도 세상이 자신의 투영임을 주장했지만 그의 이론도 아주 완벽한 이론은 아니었다. 그래도 진실에 가깝다.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데 어찌 이게 꿈일 수가 있어! 실재하잖아!라고 당연히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정말이지 우리가 잠자면서 꾸는 꿈보다 훨씬 더 생생한 꿈이다. 사람들이 피도 흘리고 죽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개리 알 레너드의 <우주가 사라지다> 시리즈를 읽고 크게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에 재밌는 시도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 책을 읽고는 없는 세상을 없는 것으로 바라볼 수 있게 그리고 실체에 대해 경험하고 싶었다. 실체는 신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가장 궁극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데 알면 알수록 느끼면 느낄수록 감동적이고 황홀했다. 이런 글을 적는 순간에도 나는 아직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 결국 앎이다. 내가 다 안다며 자부하는 것이 오만이다. 언어란 진리에서 두 번 멀어져 있음으로 경험이 중요하다. 나의 영적인 수준이 꽉 막혀 멈추어있는 것만 같을 때에도 어느 순간 길을 걷다

광활한 세상으로부터 작은 내가 있는 것이 아닌 나로부터 이 세상이 펼쳐진 것이었음을 정말 한순간 깨달았을 때 눈물이 멈추지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