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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간 끝에서 온 빛 Dec 18. 2023

왜인지 슬픈날에 대해 대처하는 방법

오늘은 슬프다. 이유도 없이 공허했기때문이다.


사람을 만나는데도 공허하다.

카톡을 개인적으로 친밀하게 하는 대상이 별로 없기도했다. 내 자아가 사라질 정도로 빠졌던 사람에게서도 애정을 왜인지 찾지못하는 날이다.


왜인지 슬픈날이다.

슬픔에 이유가 있어보이는 날은 그나마 덜 공허하고

덜 슬픈데.


뉴스 기사를 보다가 허망한 소식 한두번 들려오냐만은

졸업여행으로 대학을 가려던 고등학생이 펜션에서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허망하게 죽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인생은 왜 그럴까.


평소라면 그냥 자나갔을 뉴스 기사인데 너무 허망하고 슬펐다. 그냥 지나갔을 뉴스기사. 많은 이들이 나의 죽음을 그냥 지나가는 뉴스기사정도로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하는 이상한 쓸쓸한 외로운 생각에서 못빠져나오고 있다. 죽음은 존재할까?에 대한 내 의문을 오늘 또 다시 종결하고싶다. 공허함은 죽음이 존재한다고 믿는 광기에서 나온다. 죽음은 존재한다는 명제가 공허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죽음은 존재하지않는다. 저 명제를 틀렸다고 결정내리겠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하지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나 자신 또한 죽지못하는 존재라고 결정내렸기때문이다. 몸이 죽은 것이 내가 죽은게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몸이 아니기때문이다. 내개 몸이라고 착각하는 동안에는 슬픔이라는 착각속에서 영원히 못빠져나올 것 같은 너무도 생생한 꿈을 꾼다. 생생해서 꿈인줄 몰랐지만 진짜로 이 세상은 생생한 꿈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다양한 무수한 죽음과 다양한 슬픔과 다양한 이별이 있는 것처럼보인다. 이게 진실이다. 여기서 나의 슬픔에 대해서 분석해보자면 의문을 가져보자면 슬픔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내 대답은 아니다이다. 슬픔은 존재하지않는다. 죽음은 존재하지않는다. 그러니 그들도 죽은적이 없다.

어찌 할 수 있는 것도 없지만은 내 가슴에 구멍도 메꿔보려고 하였으나 하염없이 커져만 가고있었다.

영원히 메꿀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행복이 없는 곳에서 행복을 찾을 수는 없기때문에 행복이 없는 곳에서 행복을 찾지않아도 되는 것이다. 슬퍼 마땅해야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내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사건들은 내 마음속의 상징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진정한 겸손이란 그것을 아는 것이다. 수많은 짜증남들이 전쟁이라는 상징으로 펼쳐지고 수많은 슬픔들이 누군가의 자살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들의 전쟁 그의 자살 그의 죽임이 결코 아니다. 내가 그런 모습을 보기로 결정했기땜 ㄴ에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내게 상징으로 나타나주었다.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인것이다. 그들이 꾸는 그들의 꿈이 아니라 내가 꾸는 내 꿈속이다. 그러니 모든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진실이 결코 아니다. 그것을 진실로 보는 순간 세상 온갖 슬픔은 내것이다. 그러나 그들을 판단하지않고 있는 그대로 용서했을 때 나는 자유로워질 것이다.


혁명이란, 무언가를 때려부수고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가짜 왕국을 만들어내는 것은 혁명이 아니다. 진정한 혁명이란, 진정한 쿠데타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그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고 누가 있겠냐고 따지겠지만 진짜로 도달할 수 있는 사람은 만명중에 한명도 안된다. 부처님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부처님보다 우리중에 덜 거룩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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