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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예원 Nov 16. 2019

의미 없는 다정함에 속아 상처 받은 이

어장관리에 관하여


내가 어릴 적에 야시장 한가운데에 있던 금붕어 잡이 가게에서 금붕어 네 마리를 잡아왔다. 그런데 두 마리는 일찍 죽고 나머지 두 마리는 거진 3년가량을 키웠다. 보통 그런 야시장에서 잡아 오면 오래 못 사는 경우가 태반인데, 두 마리가 먼저 죽어버리니 더 열심히 어항 속 물도 갈아주고 그 어항이 혹여 작을까 점점 더 큰 어항으로 옮겨주기도 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내 생각엔 꽤 오래 키웠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날, 조금 새로운 얘기를 들었다. 


어항 속 물을 갈아주려면 금붕어를 잠시 다른 곳으로 옮겨주어야 하는데, 나는 그때 뜰채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내 손으로 잡아 옮겨주곤 했다. 날카로운 철사로 된 뜰채보다는 부드러운 내 손바닥이 금붕어들에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그랬다. 사람의 체온이 36.5도로 물속에 사는 물고기에겐 그 온도가 너무나도 뜨거워서 내 체온만으로도 연약한 그들의 비늘이 화상을 입는다고 했다. 철사로 된 뜰채보다 오히려 내 손이 그들에겐 더 괴로운 존재였던 것이다. 부드러운 손바닥보다 날카로운 뜰채가 오히려 그들에겐 더 나은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우리는 현재 '어장관리'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마치 나에게 관심이 있는 것처럼 행동하나, 관계의 발전은 없이 그저 그런 표현과 애매한 순간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쓰는 말이다. 요즘 나는 그 표현에 참 적절함을 느낀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겐 차라리 날카로운 뜰채 같은 말로 어서 그 사람을 원래의 일상으로 옮겨줘야 하는데, 나 갖기는 싫고 남 주기엔 아까운 그 고약한 심보가 괜히 부드러운 손바닥으로 나를 주물럭댄다. 그 말속의 온기가 거짓인 줄도 모르고 나는 계속 화상을 입고 있는데도.


나중엔 결국 화상을 입어 비늘이 뚝뚝 떨어지고 흉한 모습이 되어 그에게 버려지면, 차라리 그 차가운 뜰채 같은 말들이 더 내겐 친절하고 예의 바른말이었음을 깨달을 텐데.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거면, 의미 없는 다정함과 따듯한 말을 삼가주는 게 더 예의인 걸 너무 잘 알아버린 지금. 그 다정한 말에 내 비늘은 계속 타들어가는 것도 알고 있는 지금.


그래서 나는 이제 누군가의 날 향한 관심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경계한다. 더욱이 그래서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방법도 점점 잊어간다.





요즘 들어 생각하곤 한다.


사람을 재는 것과 조심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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