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연재를 마치면서

미국 들여다보기 (69)

1960년대 중반에 ‘서울 유학’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경상북도 영주에서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서울로 보내져서 모든 것이 낯선 2학년이 시작되었습니다. 다른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 만난 아이들이 ‘안녕’이라면서 인사를 건네 왔습니다. 그 ‘안녕’이라는 말에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몰라서 뻘쭘했습니다. 그런데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헤어질 때에도 ‘안녕’이라고 말했습니다. 이상했습니다. 아침에 만날 때에도 ‘안녕’이고 학교 마치고 헤어질 때에도 ‘안녕’이라니… 아침의 ‘안녕’은 끝이 올라가고 헤어질 때 ‘안녕’은 끝이 내려간다는 차이를 알게 되기까지 몇 달 걸렸습니다. 영주의 등굣길에는 서울말로는 ‘왔어?’라는 뜻인 ‘왔나?’라고 말했습니다. 하굣길에는 ‘잘 가’라는 말에서 앞부분의 ‘잘’은 생략하고 뒷부분의 ‘가’만 떼어서 ‘가제이’라고 말했습니다.


묵찌빠 할 때에도 규칙이 달랐습니다. 당시 영주에서는, 묵/찌/빠 중에서 지금 어떤 것을 택했는가와 상관없이, 공격이 교대로 이루어졌습니다. 구슬치기 할 때에도 서울에서는 구멍을 다섯 개 팠지만 영주에서는 그 다섯 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구멍을 하나 더 팠고 그 구멍까지 들어가야 최종 승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방학이 되어 영주에 돌아갔을 때에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동네 아이들 앞에서 아직은 어색한 서울말을 했을 때 그들은 서울말을 한다고 놀렸습니다. 운율이 섞인 말로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고기’라며 놀려댔습니다. 두 살 어린 남동생도 그쪽 일행이 되어 놀렸습니다. 그때 서울에도 영주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젊은 시절에 최인훈의 ‘광장’을 읽을 때 이쪽에서도 저쪽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그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던 주인공의 심정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국민학교 2학년 그 어린 시절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2년 나이 마흔 초반에 태평양을 건너면서 국민학교 2학년 때의 상황을 다시 만났습니다. 문화의 이질감과 주변인이라는 느낌. 다시 시작할 밖에요.


그때 들은 것 중에 ‘낚시를 하려면 라이선스(license)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속으로 ‘아니 낚시하는데 무슨 라이선스가 필요해?… 이 라이선스를 받기 위한 시험에서는 낚시에 관해서 뭘 물어보는 것일까?...’하고 생각했습니다. 얼마 안 있다가 낚시 라이선스는 ‘돈을 주고 산다’는 얘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아니 시험도 없이 돈만 주면 라이선스를 받을 수 있다고? 몇 년 뒤에 낚시 좋아하시는 분을 따라 낚시 가면서 ‘라이선스를 산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만 낚시할 예정인데 ‘하루짜리’는 없고 ‘1주일짜리’를 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셰넌도어 국립공원을 갔을 때에도 그랬습니다. 그날 당일 ‘하루’만 구경할 것인데도 ‘1주일’ 동안 출입이 가능한 입장권을 사야 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돈을 낸다는 생각에 억울했습니다.


자동차 앞쪽에는 자동차 번호판을 달지 않고 자동차 뒤쪽에만 다는 주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대통령 취임하는 날은 공휴일이지만 선거하는 날은 공휴일이 아니고, 처음 보는 사람인데 아직 이름을 모르면 이름 대신에 ‘friend’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서 ‘friend = 친구’라는 공식을 버려야 했습니다. 학교에서 배우지 않은 ‘what’s up’이라는 인사에 대한 대답을 몰라서 애매한 미소를 지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사방에 가득한 이상한 것들을 관찰하고, 물어보고, 자료를 찾으면서 조금씩 아는 것을 늘여갔습니다. 그런 것들을 기반으로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시작 즈음에 30대 초반의 조카가 미국으로 이민 오게 되어 그동안 알게 된 미국에 관한 소소한 얘기를 그에게 소개한다는 기쁨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1년 4개월 동안 미국에 관한 얘기와 미국과 한국을 비교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휴가 중에도 원고를 보냈고 아파서 병가를 냈을 때에도 연재는 계속했습니다. 화요일 게재를 위해서 월요일 아침까지는 원고를 보내야 하는데 월요일에 출근해야 하기 때문에 결국 일요일 밤에 원고를 보내야 했습니다. 일요일 밤늦게까지 원고 정리를 해야 했으며 때로는 월요일 새벽에 마치기도 했습니다. 이제 연재를 마치면서 제일 좋은 것은 일요일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몰라도 사는 데 아무 지장 없는 얘기들이었습니다. 그저 문화비교에 관심 있었기에 궁금한 것들의 답을 찾는 과정에서 알게 된 것들을 적었습니다. 아직도 미국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습니다. 연재는 여기서 멈춥니다만 탐구는 계속됩니다. 오래전에 ‘호기심이 있다면 늙은이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직도 호기심이 있으므로 아직은 늙은이가 아닌 것으로 믿고 삽니다.


그동안 ‘미국 들여다보기’를 사랑해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이 연재를 위한 지면을 허락해주신 한국일보사에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가오는 2023년 새해에 독자 여러분께 건강과 행운이 함께 하기를 기원하면서 이 연재를 마칩니다. <끝>


작가의 이전글 헤어질 때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