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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매와 딸

엄마도 운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엄마였다. 어머니의 ‘엄마 이전의 모습’은 직접 본 적이 없다. 항상 ‘엄마’였다.


  6.25 난리통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행방불명된 후 외할아버지께서는 후사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결국 밖에서 젊은 여자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보셨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으셨던 외할머니께서는 사위인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영주를 떠나 서울에서 우리 삼남매의 밥을 해 주시면서 지내셨다. 그러다 어느 햇빛 좋은 날 낮에 빨래하시다 쓰러지시고는 그 날 저녁에 아주 가셨다. 소식을 들은 어머니께서 그다음 날 급히 서울로 향하셨는데, 도착하시자마자 대성통곡을 하셨다. 글자 그대로 대-성-통-곡.

“어매요, 어매요…” 

(엄마, 엄마…)

누가 보든 말든 상관하지 않으셨다. 어머니 나이 마흔 되기 전의 일이었다. 국민학생(지금의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그때 처음 보았다. 엄마가 우는 것을.

‘아… 엄마가 운다… 큰 소리로 운다… 곁에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가 보다…’

이 얼마나 생경한 모습인가. 우리 육남매를 키우면서 항상 강한 모습만 보이셨는데. 

“어매요, 어매요…”

어머니의 대성통곡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엄마>가 <운다>는 사실에 나는 몹시도 놀랐다. 


  외할머니 그렇게 가신 후 영주에 남아있던 동생 셋 마저 서울로 보내고 어머니께서는 아버지 계시던 영주와 우리 육남매가 있는 서울을 오가시면서 양쪽을 모두 보살피셨다. 그러던 몇 년 뒤의 일이었다. 우리와 함께 서울에 계시던 어머니께서 갑자기 몹시 아프셨다. 의사가 왕진을 다녀간 후 어머니께서는, 민간요법이라기보다는 무속 요법에 가까워 보이는, 일종의 치료 의식을 하셨다. 자리에 누워서 부엌칼의 칼끝을 얼굴로 향하게 한 후 그 칼에 찬물을 조금씩 부어 칼끝에서 떨어지는 물을 입 안으로 흘려 넣는 것이었다. 중학생이던 내게는 몹시 기괴한 그리고 조금은 무섭게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그렇게 칼끝에서 떨어지는 물을 몇 모금 드신 후에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서 말씀하셨다.

“하이고 어매요… 하이고 어매요… 내 죽니데이, 내 죽니데이…”

(아이고 엄마, 아이고 엄마… 나 죽을 것 같이 아파요, 나 죽을 것 같이 아파요…)

그때에도 놀랐다.

엄마가 엄마의 엄마를 찾는다…

엄마도 <아프면 엄마를 찾는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제서야 ‘아… 엄마도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구나…’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좀 더 세월이 지나고 어머니를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어머니에게도 엄마가 아닌 시절 즉 엄마 이전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예닐곱 시절에는 뭔가 외할머니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을 저질러서 ‘아이고 이노무 지지바가!’ (아니 이년이!) 하시면서 빗자루를 들고 따라나서시는 외할머니를 피해 외갓집 마당을 가로질러 달아나셨을 것이다. 열 살 안팎에는 자꾸 눈길이 가는 동네 오빠가 있었을 것이고, 열서너 살 시절의 어머니를 속으로 좋아한 건너 마을 어느 오빠가 차마 말은 못하고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을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엄마가 아닌 엄마 이전의 시기를 생각해보면서, 어머니는 내게는 항상 엄마였지만 정작 당신은 그저 외할머니의 딸이었을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외할머니 돌아가셨을 때 “어매요, 어매요…”하고 대성통곡을 하셨던 것이고, 몹시 아프셨을 때 “하이고 어매요, 하이고 어매요… 내 죽니데이, 내 죽니데이…”하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셨던 것이다.


  어머니께서 “어매요, 어매요…”하고 부르시던 외할머니께서는 오십여 년 전에 이미 가셨고, 그 외할머니를 “어매요, 어매요…”하며 부르시던 어머니도 두어 해 전에 가셨다.

그 먼 곳에서 어매와 딸은 다시 만나셨으려나……

만나서 옛날 얘기도 좀 하고 그러셨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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