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확인
내 큰 몸뚱이는 태어난 후 지금까지 자손 번식이란 목적을 위해 난자를 내보내고, 월경도 하며 올망졸망 잉태만을 기다려왔겠지만 나는 번식할 욕망이 1도 없었더랬다. 그러다 긴 고민 끝, 임신을 도전해 보기로 했는데 아니. 어떻게 한 번에.. 그동안 피임을 정말 잘 해왔구나 놀랍기만 했다.
임신을 적극적으로 계획하고 시작한 일이라지 '갑자기?'라는 말도 꽤 이상하다. 적어도 3-6개월은 걸리지 않을까 예상한 탓일까? 임신을 확인하고 너무 어리둥절해서 뇌 정지 상태로 일하고 있는 남편에게 걸어가 지금 바쁘냐고 물어봤다. 응 조금. 왜?라고 묻는 남편에게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몇 초간 정적이 흘렀다. '나 임신인 거 같아' 이러면서 테스트기가 있는 방으로 데려갔다. 남편은 눈물도 글썽이고 기뻐 나를 꼭 안아주었지만 나는 왠지 큰 충격을 받았을 때처럼 넋이 나갔다. 큰 뉴스에 왠지 모를 부정 단계인 것 같기도 했다. 또 나는 그냥 지금까지 잘 살아온 나라는 사람일 뿐인데 임신을 한 지금부터는 정말 어른 노릇을 해야 할 것만 같아졌다. 30대 초중반인 지금 어른 노릇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 생긴다는 게 웃기지만, 지금까지는 나 자신만을 생각하며 성취감과 즐거움을 지향하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바뀌어야 하나?라는 무언가의 부담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동시에 나의 정체성을 지금처럼 단단히 지켜나가고 싶다는 다짐이 뒤따랐다.
몸 안에서 '임신'이라는 먼지 쌓인 버튼이 눌려지자 그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척척 알아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마치 이케아 서랍을 조립하는 것처럼 1 단계: 가슴이 아파진다. 2단계: 배가 조금 아파온다. 이런 순서와 반응이 몸속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가슴이 찌릿하고 배가 생리통처럼 살살 아파지는 신체적 반응 말곤 딱히 다른 것은 못 느끼고 있다. 아직은 몸 안에 어떤 생명이 자라나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배 아픔과 가슴 통증도 평소에 생리 주기면 종종 있던 반응이기 때문에 더욱 실감 나지 않는다. 이 생각이 억지로 머리로 생각해 내어 내가 임신을 했고 또 그런 상태라는 것을 인지해야 하는 단계이다.
12주 전에는 사람들에게 임신을 알리지 않는 것이 관례로 통한다. 유산은 4-5명 중 1명꼴로 나타나고, 자연유산의 80퍼센트는 12주 이전에 일어나기 때문이다. 보통은 기쁜 소식을 전한 다음 바로 슬픈 소식을 전할까 조심스러워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12주 후에 알리는 것을 선호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 '조심스러움'이라는 것에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어떤 점이 조심스러운 지 궁금하다. 괜히 쉬쉬하는 문화 때문에 터부시되는 것은 아닌지.
여기에는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기쁜 일은 나누되 슬픈 일은 본인이 혼자 삼켜내는 데 익숙한 문화. 그리고 유산이 되면 하마 터나 엄마의 잘못으로 생각되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움. 유산의 이유는 50%가 염색체의 이상이다. 술, 담배를 하지 않고 별 건강 이상상태가 없는 부모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냥 확률적인 불운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다가 물벼락 맞은 셈이다. 그리고 그게 나이지 않을 가능성은 없다. 사실 4-5명 중 1명꼴이 유산한다는 확률은 특정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되는 2억, 5억 분의 1의 확률에 비하면 어마하게 큰 확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확인한 후 처음으로 든 생각은 가족,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내가 이런 큰일을 인생에서 겪고 있으니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함께 지켜봐 주고 응원해 달라는 마음이었다. 내가 이 몇 달의 달리기를 끝낸다면 축하를 받고 싶다고, 하지만 어떤 갑작스러운 일이 일어나면 함께 슬퍼도 해달라고. 나는 그들이 필요했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공유하고 싶었다.
가족과 몇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부모님은 예상대로 굉장히 기뻐하셨고 또 걱정스러워하기도 하셨다. 어떤 친구는 눈물을 흘리려 하기도, 어떤 친구는 나와 함께 어이없다고 깔깔 웃기도, 또 말하자마자 전화가 오기도 했는데 우리가 계획 아래 임신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