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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Oct 25. 2019

아버지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초등학교 시절, 담임선생님께서 어떤 종이를 나누어주었다. 거기에는 가정환경조사서라고 쓰여있었는데, 우리가족이 어떤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집은 전세인지 자가인지 그리고 자동차는 있는지 없는지 등을 체크하라는 내용이었다. 학교이기때문에, 그래서 아이들을 지도하는데 참고를 한다는 이유로 그런 것을 묻는 것이 무례한건지 아닌지 판단할 수도 없는 아주 어린 나이였다.  아무 생각없이 연필로 이것저것을 솔직하게 써내려간 나는 페이지 중간쯤에 있는 질문에서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였다.

 

아버지의 직업은 무엇입니까(구체적으로) 


아버지의 직업? 그 순간, 나는 옆자리에 앉아있는 짝궁의 종이로 흘깃 시선을 던졌다. 그곳에는 '회사원'이라는 글씨가 또박또박 적혀있었고, 내 눈에는 이상하게 그 글자들 하나하나가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있는듯 보였다. 


사실, 그 때는 너무 어려서 ‘무직’이라는 단어를 몰랐던 탓에, 내 머릿 속에 아주 큰 혼란이 찾아왔다. 나는 가만히 턱을 괴고 상념에 빠졌다. 생각해보니, 우리아버지의 직업은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무조건 빈칸을 채워야한다는 강박이 나를 찾아왔다. 


우리아버지의 직업? 엄마랑 같이 행운분식을 운영하기는 하는데, 요리는 엄마가 하고, 가게도 엄마가 보고, 가끔 아버지는 시장을 봐다주고, 거의 집에 계시고, 아프면 병원에 가시고, 매일 약을 드시고, 누워계시는 것을 직업으로 표현하면 무엇일까?


그 순간, 내가 왜그랬는지 모르겠다. 그냥 '회사원'이라고 적었다. 아버지가 평범한 샐러리맨처럼 양복을 입은 채 세단을 타고 출근하는 모습을 단 한번도 본 적도 없으면서 말이다. 내 생각에는 12층에 사는 윤지네 아버지가 유명한 보일러 회사에 다니시는데, 매일 검정색 브리프케이스를 들고 왔다갔다 하시는게 괜히 보통의 가정같고 좋아보였나보다. 그렇게 적고나니 2분단 끝에 앉아있던 친구가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그 종이를 걷어가기 시작했고, 그 아이가 종이의 내용이 은근히 궁금한지 이것저것 보는 것을 보고 나는 괜한 안도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매년마다 학교에서는 어김없이 이런 가정환경조사서를 나누어주고는 했는데 그 때마다 나는 똑같이 아버지의 직업을 고민했다. 다만, 그 다음해부터는 빈칸에 회사원이라는 단어를 적지않았다. 비록 어리긴하였으나 거짓말을 했다는 어떤 죄책감을 느끼긴 했나보다. 하지만 이후로 나는 적당히 스스로의 죄책감도 건들지않으면서 괜히 살짝 직업이라는 언저리에 그럴듯하게 걸쳐져있는 단어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른 것이 요식업 종사자였다. 아버지가 음식재료를 시장에서 사다주고, 가끔 가게를 봐주기도 하니까 맞지않을까 싶었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르고 부터는 ‘농부’라고 썼다. 아버지가 조그마한 농장에서 토마토니 고추니 이런 것을 취미삼아 심기 시작한 것을 보고 생각한 직업이었다. 


그러고보니 나는 한번도 아버지를 무직이라고 쓴 적이 없었다. 이런 가정환경조사서 뿐일까.... 대학교 입학서류, 아르바이트 이력서, 하물며 회사 입사서류에까지 아버지는 나의 온전한 자의적 해석에 의해 요식업 종사자 또는 농부로 기록되었다. 이제와 고백하지만 나는 정말 솔직하지 못했다. 홍길동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건 아니었지만, 왜 내 손은 그의 직업을 무직이라고 쓰지못했을까.


한편으로는, 왜 내가 대학교에 들어가면서, 직장을 얻으면서 우리아버지가 무엇을 하는가에 대해 굳이 왜 적어야하는지 그래서 내가 왜 이런 감정과 미안함에 휩싸여야하는지 화가 나기도 했다. 외국은 이런 것 따위 안써도 된다는데, 이럴 때마다 나는 남이 어떻게 사는지 참 오지랖 쩌는 대한민국이 정말 주옥같으면서도 지옥같기도 하고 뭐같기도 했다. 




영화 친구를 보면 선생님역으로 나온 김광규가 천연기념물로 지정해야할 정도로 손색이 없는 장동건의 볼을 감히 그것도 아주 꽈악 잡으며 하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네 아부지 모하시노.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장동건은 정말 타고난 명배우라고 생각했다. 그 때 장동건의 열받은 얼굴이 지금 나의 감정과도 같았으니. 그게 아마 70년대 배경이 아닐까싶은데, 90년대 후반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학창시절을 보낸 나까지 이런 자괴감을 느낄정도면 사회는 정말 변화에 더딘 듯 하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서 너희아버지가 무엇을 하시냐고, 누가 어떤 방식으로 물었던간에 쉽사리 무직이라고 대답하지못한 건 나였다. 하지만 절대 편찮은 아버지가 창피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철없는 나는 아버지가 일을 하고, 어머니가 전업주부를 하는 그저 그런  ‘평범한 가정’에 대한 동경이 있어 그런거였다고 고백하고 싶다. 그러니까 내말은 아버지가 아니라, 내 스스로가 참 창피하고 못난 자식이었다고, 너무나 미안하다고 이제라도 말하고 싶었다.





<작가의 말>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우리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아버지는 나의 영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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