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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Nov 04. 2019

나는 성공할 여자다.


오랜만에 세 자매가 한집에 모였다. 우리는 일요일 아침부터 한국에서 가장 슬픈 교양 예능 프로그램인 동물농장을 시청 중이었다. 지난밤 친구들과의 기나긴 술자리를 가지고 돌아와 화장도 못 지운 채 언제 잠이 들어버렸는지도 모르는 나는 어느 시골의 백구와 황구의 러브스토리를 보며 마스카라 농도 가득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큰언니가 나의 어깨를 툭툭 쳤다. 돌아보니 만원을 내미는 그녀가 보였다.



은주야. 떡순튀 (떡볶이 + 순대 + 튀김) 좀 사 와. 잔돈은 너 가지고.



나는 말없이 그 돈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내가 아직도 잔돈으로 꼬시면 아무 말 없이 다녀올 초딩으로 보이나? 그래! 나는 그런 막내야. 엄마 뱃속에서 나올 때부터 그런 유전자였어. 나는 군말 없이 만원을 받아 주머니에 쏙 넣고는 더러운 화장기를 가릴 수 있는 후드를 뒤집어썼다. 가기 싫다는 말을 해봤자 어차피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30년 전부터 떡볶이 심부름은 막내가 해야 하고, 첫째는 자금을 대야 하며, 둘째는 그저 무임승차를 하는 것이 이 집의 암묵적인 룰이니까. 아아, 백구와 황구가 다시 재회했는지 너무 궁금했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현관문을 열었다. 떡순튀가 팔천 원이니 나머지 이천 원으로 커피나 사 먹을 테다, 룰루루!


이윽고, 식탁 위에 까아만봉지를 올려놓자 큰언니는 배를 갈랐고 그곳에서는 아름다운 밀떡과 튀김이 고추장 양념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우리 세 자매는 나무젓가락을 동시에 꽂았다. 그리고 곧 수다가 시작되었다.



둘째 언니 : 언니, 나 수영복 살려고.

첫째 언니 : 비키니? 아니다, 요즘 레드가쉬가 그렇게 유행이라며. 너도 그거 입어라.

둘째 언니 : 언니, 레드가쉬가 아니라 래.쉬.가.드.

첫째 언니 : 아아, 맞다! 그래. 래쉬가드!

나 : ….

첫째 언니 : 그나저나, 요즘 투애니원 노래가 너무 좋지 않니. 나 맨날 그것만 듣잖아. 아이 돈 크라이!

둘째 언니 : 언니. 아이 돈 케어 말하는 거지? 아돈케에.에.에.에.에. 아돈 케에 에.에.에.에,에.

첫째 언니 : 아아, 맞다! 아. 이. 돈. 케. 어! 디엘 너무 랩 잘해. 그치?

둘째 언니 : 언니, 씨.엘이야 씨.엘.



우리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큰언니는 항상 잘 말하다가 영어단어만 나오면 조금 삐끗거렸다. 애써 모른척하는 나와는 달리 그것을 빼먹지 않고 바로잡아주는 이는 작은언니였다. 민망할 법도 한데 큰언니는 둘째 언니의 말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작은언니는 우리 집에서 배출한 '신촌 모여대 출신의 수재'였고, 자칭 80% 타칭 20% 비율로 인정받는 네이티브급 수준 영어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녀가 말하는 것은 모두 정답이었다. 그러나 마냥 그 교정(?)을 듣고만 있던 큰언니의 마지막 말은 늘 이런 식으로 끝나곤 했다.



그래도 나는 영어는 못하지만 일본어를 잘해. 후훗. 내가 일본에 가잖아? 다 나보고 원래부터 여기 살던 사람 아니었냐고 막 물어봐. 그러다가 내가 아니요, 저는 한국인입니다. 하면 에에-? 스고이! 하고 다 놀래곤 하지. 완! 전! 일본인인 줄 알았다고오! 하하하. 저번에도 말이야, 로컬 야키토리 집에 갔는데….



사실 작은언니와 나는 큰언니의 이 레퍼토리를 약 120번 정도 들어서인지 이제는 아무 감흥도 반응도 없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큰언니는 오늘도 마이웨이다. 그냥 계에에에에속 이야기한다. 세상에서 가장 일본어를 잘하는 한국인의 자부심을 담은 표정을 지으면서. 현재 이 글을 쓰는 나는 다음 주에도 친정을 가고, 큰언니를 만나기로 되어있다. 나는 점쟁이처럼 방울을 흔들지 않아도 확신할 수 있다. 머릿속에서 그분이 말씀하신다. 너네 언니 또 121번째로 저 이야기를 꺼낼 거라고.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우리 큰언니는 정말 일본어를 네이티브급으로 잘한다. 누군가 언니에게 일본어를 전공하였느냐고 물어볼 정도로. 여기서 더 대단한 한 가지가 있다. 바로, 큰언니는 대학 졸업장 없이 일본어를 정복한 여자라는 거다.





언니에게 대학은 조금 어려운 숙제와 같았다. 왜냐하면 큰언니의 수능점수는 음…, 그렇게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 적의 나는 교복을 입은 언니가 책상에 진득이 앉아 공부를 하는 것을 본 역사가 없다. 그저 구본승과 DJ.DOC를 지나 H.O.T. 까지 옮겨가며 꾸준한 덕질을 하는 것을 봐왔을 뿐이다.


그러나 장장 20년이나 금이야 옥이야 키운 자식이 그리 좋지 못한 성적표를 들고 오니 부모님이 실망을 안 했을 리가 없다. 아직도 언니가 수능을 마치고 집으로 귀가한 그 날을 기억한다. 언니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현관에 주저앉아 울었다. 그리고 엄마와 아버지, 그리고 큰언니 사이에 오고 간 기류는 꽤나 심각했다. 굳이 영화 장르로 따지자면 ‘액션’과 ‘느와르’ 그 어딘가 일 것이다. 초등학교 오학년밖에 안된 내가 그 모습을 주욱 지켜보며 했던 생각은, 대학은 안 가면 안 되는 거구나 그리고 대학 문턱을 못 넘으면 이 세상이 아니라 엄마 아빠한테 먼저 죽는 거구나였다.


이후, 큰언니는 대학교 교문을 지나는 대신 행운분식으로 출근해 앞치마를 둘러매었다. 중학교 때부터 가게가 바쁠 때마다 김밥을 말았던 행운분식의 딸이었으니 일머리는 끝내줬다. 손님들이 밀려와 우동, 짜장, 잔치국수, 김밥, 김치찌개 등 온갖 음식들을 다 나열하며 뒤죽박죽 주문해도 언니는 벌써 머릿속으로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감으로 알았고, 김밥은 또 얼마나 깔끔하고 스피디하게 말았나. 비록 성적표에서 그녀는 하위권이었을지 몰라도, 적어도 행운 분식에서는 일등이었다. 그녀가 스물여섯이 될 때까지.


자신의 이십 대 절반을 온전히 바친 언니는 행운분식에서 받은 월급을 저축하기도 하였지만, 쉬는 날 우리 자매에게 치킨이나 피자를 사주거나 용돈을 주기도 했고, 언니의 동창들을 만나 아주 큰 한방을 쏘기도 하였으며, 머리를 노란색으로 염색하고, 옷과 지갑 등을 구매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시절, 부족할 것 없었던 언니의 노란 머리카락, 언니의 옷, 언니의 지갑에서는 너무나도 익숙한 우동냄새, 바로 행운 분식 냄새가 났다.




큰언니가 지나온 이십 대의 절반은 어땠을까. 현재 회사에서 채용담당자로 일하고 있는 나는 가끔 대학생 아르바이트 친구들을 고용하기도 하는데 그 친구들의 나이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스무 살 혹은 많아봐야 스물네 살 정도의 친구들이다. 그들에게는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순수한 눈망울이 있으며, 옅은 화장품 냄새가 나기도 하고, 가장 빛나는 청춘의 빛이 보이기도 한다. 과연, 우리 큰언니라고 그렇지 않았을까.


학창 시절의 큰언니가 자신의 이십 대를 어떻게 상상했을지는 모르지만 그 종착지가 행운분식은 아니었을 거라는 건 확신할 수 있다. 아마, 같은 또래들처럼 대학교 교정을 걷거나 당시에 힙한 아르바이트를 해보거나 하는 그런 소소한 거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때의 언니는 별 불만이 없어 보였다. 마치 이 큰 운명을 받아들인다든 듯. 아니, 불만이 있을지언정 적어도 내 앞에서는 어떠한 티도 내지 않았다.


그랬던 언니의 변화는 어느 사소한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언니의 유일한 유희는 가게 일이 끝나고 집에 들어와 잠들기 전까지 컴퓨터로 이런저런 해외 드라마를 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 드라마는 당시 일본에서 13년 연속 최고의 남자 설문조사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던 기무라 타쿠야 주연의 ‘하늘에서 내리는 일억 개의 별’이었다. 그리고 기무라 타쿠야는 구본승-DJ.DOC-그리고 H.O.T. 에 이어 언니의 마음 안으로 들어간다.


언니는 퇴근만 하면 컴퓨터를 켜서 기무라 타쿠야만 봤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자막이 아닌 기무라 타쿠야의 그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과 목소리에 더 집중을 하고 싶어 하였다. 그뿐인가, 기무라 타쿠야가 드라마에서 ‘보꾸와 나나 짱오’만 외쳐도 언니는 베개를 껴안으며 그 육중한 몸을 부엌에서 거실까지 이리저리 굴리며 소리를 질러대었다. 그에게 좀 더 다가가고 싶었던 걸까. 기어코 언니는 부평의 한 일본어학원에 수강료를 지불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언니가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꽤나 낯설었다.


그만큼 기무라 타쿠야는 언니의 종교였다. 그녀는 일본어로 된 그의 소속 그룹 SMAP 노래를 찬양하였고, 신실하게 그리고 경건하게 그를 모셨다. 그리고 그의 출신인 일본이라는 나라에 늪처럼 빠져들었으며 결국 스물여섯 살의 어느 날 엄마에게 이렇게 말한다.


엄마, 나 일본으로 유학 갈 거야.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행운분식의 직원인 것을 떠나서 자신의 딸이 타국에서 고생할 것이 너무 훤히 보여서 그랬는지 모른다. 그리고, 다른 이유도 아닌 공부를 하러 일본을 간다니. 하려면 진즉에 고등학교 때나 하지 왜 그 수능이란 것은 다 말아먹고 이제야 늦어서 시작한다는 건가. 차곡차곡 돈 모아서 좋은 남자에게 시집가는 것이 더 좋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엄마가 큰언니를 매우 의지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장녀라는 이름의 자식은 엄마에게는 신부(神父)의 존재다. 사랑하고, 기댈 수 있으며, 남편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을 고하게 만드는 사람. 그런 존재가 떠나간다고 생각하니 엄마는 억장이 무너졌다.


그렇지만 이런 엄마의 간절함도 언니를 잡을 수 없었다. 무엇이 그렇게 언니를 끌어당겼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언니는 배우고 싶었나 보다. 그렇게 홀리듯이 일본으로 출국했다.




언니가 떠난 후, 우리 집은 조금 헛헛했다. 이럴 거면 등치나 크지 말던지, 왜 뚱뚱해서 집안 이곳저곳에 존재감을 남기고 다녔나 싶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언니가 주는 돈으로 떡볶이 심부름을 하고 남은 잔돈도 챙길 수 없지 않나. 큰언니, 그때 참 보고 싶었다.


가끔 큰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는 아르바이트를 세 개나 하고 있다고 했다. 이탈리아 피자집, 꼬치집, 그리고 한인 슈퍼. 거기다가 일본어 학교까지 다닌다고 했다. 힘들겠다,라고 생각했지만 누구보다 그녀의 목소리는 씩씩했다. 하기사 행운분식에서 어려운 손님들도 많이 겪었고, 어떠한 주문도 척척 받아내는 그녀인데 생활력이 없을 수가 없었다. 아마 언니는 사막에 던져놔도 어떻게든 걷고 걸어 오아시스를 찾아낼 수 있는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이런 전화도 왔었다. 큰언니가 일본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았다는 소식이었다. 뭐, 글쓰기 대회라고 했는데 자기 말로는 엄청난 경쟁률을 뚫었다고 했다. 엄마는 반색을 했다. 중고등학교 때는 그렇게 공부하라 해도 귓전으로도 안 듣더니, 이제는 제 발로 일본이라는 나라를 가서 엔화를 벌어오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언니는 공부머리가 없는 게 아니라 그냥 안 했던 거였다. 고등학교 공부는 그저 언니에게 재미없는 것들이었을 뿐.


그래서 큰언니의 삶은 어떻게 되었냐고? 큰언니는 일본어를 자기 욕심만큼 마스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기무라타쿠야가 나오는 드라마는 기본이고, 예능에 NHK 뉴스까지 모두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언니가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오랜만에 한발을 내딛었을 때, 나는 엄청난 놀라움에 사로잡혀 그 자리에 그대로 굳고말았다. 분명히 일본에서 힘든 아르바이트를 세개씩 돌려가며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는데 왜 등치는 변함이 없는가라는 충격에….


하하 아니, 진짜 이유는 사실 따로 있다. 바로, 떠났을 때보다 훨씬 당당한 모습으로 우뚝 서있는 언니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더 이상 언니의 옷에는 행운분식의 우동냄새가 나지 않았다. 자기 삶을 온전히 찾은 큰언니라는 사람의 냄새가 있었다.


나는 유학 전, 그녀가 일본어학원을 아주 열심히 다녔을 때  몰래 그녀의 책을 펼쳐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 전에는 책상 근처에도 가지않던 언니가 대체 뭘 그렇게 그곳에 앉아 끄적거리고 있었는지 꽤나 궁금했다. 기초 일본어라고 쓰여있던 그 책의 표지를 넘기면 초록색 간지가 나왔는데 그곳에는 그녀 특유의 네모진 글씨체로 이루어진 한 줄의 문장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유심히 눈으로 훑다 손가락으로 한자한자 천천히 문질렀다.



나는 성.공.할 여자다!



멋있었다. 그리고 묻고싶었다. 언니, 언니가 생각하는 성공은 뭐야, 라고. 그러나 묻지못했다. 나는 그저 몰래 펼쳤단 책을 있던 그대로 덮을 뿐이었다. 이제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는 건 스물여섯 살에 행운분식에서 일하며 번 돈으로 부족함 없이 살았다고 해도 언니는 성공을 이루었다고 말하진 않았을 것 같다는 거다. 언니에게는 행운분식이라는 우물을 떠나 더 넓은 세계를 본 것이, 그리고 외국어를 정복한 것이, 그곳에서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이 아마 성공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나는 영어는 못하지만 일본어를 잘해. 후훗. 내가 일본에 가잖아? 다 나보고 원래부터 여기 살던 사람 아니었냐고 막 물어봐. 그러다가 내가 아니요, 저는 한국인입니다. 하면 에에-? 스고이! 하고 다 놀래곤 하지. 완!전! 일본인인줄 알았다고오! 하하하. 저번에도 말이야, 로컬 야키토리집에 갔는데….



난 저렇게 말하는 언니가 좋다. 래쉬가드를 레드가쉬라고 하든, 아이돈케어를 아이돈크라이라고 하든, 씨엘이 디엘이 되든 상관없다. 언니가 언니의 삶으로 당당하다면 난 그게 제일 좋다. 그녀는 나에게 존경스럽고, 항상 자랑스러운 사람이다. 그러니까.



언니는,

우리 언니는,

성. 공. 한. 여자다!










<작가의 말>

오늘도 긴 시간 내어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공지>

24시 연중무휴 행운분식 이야기는 브런치북과 브런치매거진 이렇게 둘로 나누어 연재됩니다. 그 곳에서 더 많은 에피소드를 볼 수 있어요. 언제나 시간을 내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팟캐스트에서 에피소드를 낭독하고 비하인드 스토리도 이야기하고 있어요. 함께해요. 

http://www.podbbang.com/ch/1774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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