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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Nov 07. 2019

1995년, 분식집에서 일어난 기적

1995년. 브라운관 속 뉴스에서는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했다는 소식이 연일 보도 중이었다. 화면을 보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앞으로 더 잘살게 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가 보이기도 했고, 모이기만 하면 우리나라도 곧 선진국 대열에 오를 수준이 되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엄마는 카운터에 앉아 돈통을 뒤적거렸다. 아니, 사실은 뒤적거릴 필요도 없었다. 붉은 천 원짜리 지폐 몇 개만 저들끼리 뒹굴거릴 뿐이었으니. 그건 오늘 하루 내내 우동 한 그릇과 짜장 한 그릇을 맞바꾼 초라한 점수표였다.


문득, 가겟방에 신음하며 누워있는 남편이 생각났다. 수술을 끝내고 나온 의사는 그가 평생 병원을 다녀야 하고, 평생 약을 달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참 아이러니한 말이었다. 자신에게 ‘평생’이란, 평생 행복하게 살자…. 평생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게 해 줄게…, 와 같은 낯간지러운 말에만 붙는 녀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의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무덤덤한 그 말 하나가 보기 좋게 자신의 인생을 바꾸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전업주부에서 하루 장사를 공치는 분식집 사장으로.


엄마는 뒹구는 붉은 지폐를 빤히 바라보았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비집고 나오려는 울음을 애써 참아내고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울면 안 된다. 나는 세 딸의 엄마이자 가장이다.

강해져야 한다. 나는 세 딸의 엄마이자 가장이다.


이윽고, 가겟방이 위치한 뒤편에서 절뚝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엄마는 왔어요, 하며 표정을 바꾸고 남편을 맞이했다. 무엇도 하지 않았는데 병색이 만연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성치 않은 몸이지만 손님이 오면 서빙을 돕겠다고 했다. 그녀는 남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남편이 가장의 짐을 본인에게 넘기고 미안함과 부채의식에 시달리고 있다는 걸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웃으며 알겠다고 했다.





그때,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던 행운분식의 문이 열렸다.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고스란히 두 사람에게 전해졌다. 두 명의 남자손님은 휑한 가게를 미덥지못한 눈빛으로 쓰윽 훑고는 마지못해 앉으며 옛날짜장 두그릇을 주문하였다. 그리고 뒤이어  들어온 손님들은 노란 유니폼을 입은 택시기사들이었다. 그들은 우동 두 그릇, 짜장 세 그릇을 주문했다.


고작 두 팀일 뿐인데 엄마는 진땀을 뺐다. 장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탓에 주방은 온전한 자신의 것이 아니었고, 요리의 순서도 손이 먼저 나가는 것이 아닌 머릿속으로 힘들게 그 차례를 복기하는 수준이었다. 허둥지둥 반찬을 그릇에 담았다. 빠진 것이 없나 확인하였지만 확신은 들지 않았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애석하게도 결과는 낙제 수준이었다. 손님들은 몇 젓가락을 들다 먹기를 포기하기 이르렀다. 어떤 손님은 가게를 나서며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야, 우리 집에 가서 짜파게티 끓여먹자. 그렇다. 그때의 우리 엄마 음식은 말 그대로 ‘옛날짜장’ 맛이었다. 너무나 아득한 옛날이어서 한국사람이나 조선사람은 먹을 수 없고 고려시대 사람들 정도는 먹을 수 있었던 맛. 아마도 그 날, 백종원 아저씨가 행운 분식에 찾아왔다면 우리는 밀가루가 되도록 혼이 났을 수도, 전 국민의 질타를 받았을 수도 있었다. 그때가 백종원의 골목식당이 없는 1995년이었다는 건 우리에게 꽤나 다행이었다.


엄마는 손님들이 남긴 음식이 가득한 그릇만 망연히 쳐다보았다. 저들도 다신 이 곳에 오지 않을 테다. 지나간 손님들이 모두 그랬으니까. 갑자기 자신이 너무 음식장사를 쉽게 본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집에서 가스불은 켜봤으니 이건 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엄마는 한숨을 쉬며 쓰레기통에 남은 것들을 부었다. 자신의 고민들도 다 사라지길 바라면서.





그즈음, 홀에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의외였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앞에 두고 웃는 이들은 이제껏 없었으니 말이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엄마는 가림막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소리의 주인공은 남편과 손님으로 온 택시기사님들이었다.



아니, 그러니까…. 택시를 하다가 하루아침에 몸져누우셨다고?


네…. 아이고, 저도 이렇게 될 줄 어떻게 알았어요. 택시만 19년이에요, 19년…. 나는 평생 이 일하면서 우리 처자식 다 먹여 살릴 줄 알았죠…. 그런데 이제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그래서…, 장사는 잘 되시고?




양 무릎 위로 마른 손을 짚은 채 아버지가 고개를 저었다. 택시기사님들은 그런 아버지를 묘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공치는 날이 부지기수예요. 아이 엄마도 저도…, 이게 맞나 싶기도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없잖아요. 나는 평생 운전만 했고, 저 양반은 평생 아이만 키웠으니…. 방도가 없어요.


에휴…, 자식은 몇 이유?


딸이 셋이에요. 큰애는 중학생, 작은 애는 국민학생, 그리고 이제 막내는 내년이면 학교 들어가요. 있잖아요, 나는 내가 꽤나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정말 한 순간이더라고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택시기사님들은 어떤 말도 잇지 못했다. 때로는 겪어보지 않은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척하는 것보다 침묵이 나을 수 있다는 걸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고있었다. 1995년은 국민연금이니 퇴직연금이니 하는 것들도 신경쓰지 않았던 시대였다. 택시기사님들은 아마도 그 날, 준비되지않은 자신들이 마주할 수도 있는 여러 갈래의 미래 중 하나를 아버지에게서 발견했을 수도 있다. 반대로, 아버지는 노오란 기사 유니폼을 입고 옛날짜장을 먹고 있는 그들에게서 자신이 가장으로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반짝반짝 빛나던 과거를 발견했다.


그러니까, 그들은 서로의 괜찮은 과거이자 아주 질이 나쁜 미래였다.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열심히 운전대를 잡고 타고내리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예전의 자신을 떠올린 순간이었고, 맞은편 기사님들은 선택하고 싶지 않은 후순위의 미래를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다섯 분의 택시기사님들은 행운분식의 역사상 처음으로 재방문을 한 손님이자, 최초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매일 저녁시간이 되면 가게 앞에는 택시 다섯 대가 주르륵 일열을 이루고 섰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동시에 차문을 열고 내린 아저씨들이 행운 분식에 들어서서 가장 먼저 한 말은 ‘은주 엄마! 오늘은 가장 안 팔린 게 뭐유.’였다. 그러면 엄마는 자기도 모르게 눈썹을 시옷자로 만들며 죽는소리를 했다.


오늘은…, 짜장이 안 팔렸어요. 솥에 짜장이 한가득이에요.

그래요? 그럼 우리는 짜장 다섯 개!


주문을 받자마자 엄마의 눈썹은 바로 섰고, 광대는 승천했다. 그녀는 미숙한 움직임으로 그릇에 짜장을 담았다. 오늘 팔지 못하면 그릇이 아닌 다른 곳으로 직행했어야 할 것들이었다. 엄마는 아저씨들에게 짜장도 더 많이, 김밥도 한 줄 더, 단무지도, 김치도 한 움큼씩 얹으며 베풀 수 있는 것들을 모두 긁어모아 내어 주었다.


그렇게 아저씨들이 받아 든 것은 짜장 곱빼기. 물론 곱빼기를 주문한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그건 엄마의 마음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저씨들의 젓가락질은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솔직하게 말해 맛있어서라기보다는 저 집은 잘되었으면 하고 바라는 인정으로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느린 속도였고 그래서 조금은 힘든 식사였지만, 그 시절의 아저씨들은 엄마의 마음을 알기에 설거지를 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짜장을 싹싹 긁어먹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식사를 마친 어떤 기사 아저씨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엄마에게 쑥 내미는 것이 아닌가. 엄마는 기사님들에게 줄 믹스커피를 타다 말고 이게 무엇인고, 하며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것은 두 개의 투명 비닐봉지였다. 하나는 검은 것이었고 하나는 노란 것이었는데 다름 아닌 춘장과 우동국물이었다. 엄마는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주위 눈치를 연신 살피며 속삭였다.



은주 엄마, 이거 말이야. 우리 택시기사들이 정말 많이 가는 식당이거든? 아주 기가 막혀 맛이…. 이거 하나는 내가 우리 애기엄마가 짜장 먹고 싶다고 둘러대면서 가져온 거고, 이거…, 이거 받아봐요. 응. 그거는 우동국물인데 우리 집 잔치 큰 거 한다고 하면서 비슷하게 맛 낸다고 받아온 거야.

 

아니, 이 귀한걸!



반색하는 엄마 앞에서 아저씨는 누가 들을까 더 조용히 속삭이며 말했다.



내가 비법을 슬쩍 물어봤는데, 국물에 이거 넣어봐요. 메모장 어딨어? 내가 불러주는 대로 적어…. 멸치…, 쑥갓….







그 후로도 기사 아저씨들은 올 때마다 어디 짜장이 맛있다더라, 어디 우동이 맛있다더라라고 소문이 났다면서 그 집에 꼭 한번 가보라고 엄마를 부추겼다. 그러면 엄마는 나름의 공부를 하기 위해서 가방을 챙겨 들고 아버지의 차에 몸을 실었다. 그때의 기사님들은 지금으로 말하자면 우리에게 백종원 아저씨 같았다. 너무나도 소중한 솔루션을 주곤 했으니. 그리고 마침내, 시간이 흐르자 엄마의 옛날짜장와 우동은 동네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정도의 수준이 되었다.


그뿐인가, 아저씨들은 같은 업을 하는 택시기사 아저씨들에게도 알음알음 우리 가족의 사연을 전했다. 가령 이런 것이었다. 택시기사를 하다가 돌연 심장병에 걸려 가장의 자리를 내놓은 채 몸져누운 얼굴도 모르는 동료의 아내가 분식집을 개업했다더라. 앞길이 구만리인 세 딸이 있는데 내년에 막내가 국민학교를 들어간다더라….


어느새, 기사님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우리 가게로 흘러들어왔다. 처음엔 다섯 대의 택시만이 일렬로 늘어서던 가게 앞이 점점 북적이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어느 날은 손님들도 함께 내리기도 했다. 차에 탄 손님들이 아저씨, 해장 기가 막히게 되는 집 없을까요.라고 하면 아저씨들의 핸들은 바로 우리 행운분식을 향할 정도였다.


지천에 널린 게 빈자리였던 가게가 어느새 시간이 지나 사람들로 가득 찼다. 습기인지 요리에서 나온 김인지 모를 것들이 창에 뿌옇게 얹어졌다. 기사 아저씨들은 방긋 웃으며 정신없이 요리를 하는 엄마와 서빙을 하는 큰딸, 그리고 아버지를 보고는 뿌듯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때, 엄마가 출입문에 어정쩡하게 서있던 아저씨들을 발견하고는 소리를 질렀다.



아니, 자리가 없어서 어떡해요! 일단 조금만 기다려요, 내가 금방…!

어어어! 은주 엄마, 됐으니까 그냥 음식만 주슈. 우리는 여기서 돗자리 깔고 먹으면 돼. 신경 쓰지 마. 하하하! 아아! 그런데…,  오늘은 가장 안 팔린 메뉴가 뭐유?!



아저씨는 엄마를 보면서 놀리듯 물었다. 엄마는 그런 아저씨를 빤히 보다 어이없고도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안 팔리는 메뉴가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알고도 묻는 것이다. 그건 엄마와 기사님들만이 아는 그들만의 농담이었다.




금방 드릴게! 조금만 기다리셔요!

어이, 은주 엄마! 오늘은 많이 줘야 되는 거 알지? 어제 김밥집 딸내미, 내가 부천역에서 비 맞는 거 발견하고 집까지 공짜로 태워다 줬잖아!

하이고오, 생색은! 알겠어요, 곱빼기에 곱빼기로 드릴 테니 배 터질 때까지 잡수셔!

하하하하!



깔깔깔. 행운 분식에 웃음소리가 퍼졌다. 엄마는 평소보다 많은 양의 우동면을 삶기 시작했다. 어느새 그녀는 환히 웃고있었다. 이제 더 이상 돈통을 바라보며 울음을 삼키지 않아도 되었다. 몸은 고되어도 꽤 괜찮은 현재였다. 문득, 엄마는 머릿 속에 그들과의 첫만남이 스쳐갔다.


파리만 날리던 가게 안에서 과거의 택시기사와 현재의 택시기사가 만나 서로의 시간을 마주한 것이 시작이었다. 아마도 아저씨들은 아버지에게서 그들의 미래를 보았을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어떻게든 행운 분식이 잘 된다면, 그래서 저 가정이 행복하게 웃는다면 자신의 미래도 꽤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바람이 가득 담긴 그들의 인정이 우리를 키우고 키워내어 24년이라는 긴 세월의 흔적을 남기게 해 주었다.  





가끔 상상을 해본다. 2019년에 우리가 만났다면 어땠을까 하고. 국민소득 수준 약 3만 3천 달러 시대. 비록 지갑은 두꺼워졌지만 인정은 메말라가는 시대. 시장논리에 의해서만 돌아가는 우리네 삶. 소란스럽게 열렸다가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가게들. 성장이 아닌 애초부터 완벽한 것을 바라고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냉정하게 외면하는 우리들. 나부터 살아야 하고, 당신은 그 다음이라는 그 마음들. 그리고 곳곳에 생겨나는 시대의 내상들. 우리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가 1995년에 만났다는 건 기적이 가까운 일이 아니었을까요.


고맙습니다. 위로가 되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배려를 해주어서.

고맙습니다. 우리를 지켜봐 주셔서.


당신들은 행운이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작가의 말>

당신들은 행운이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공지>

24시 연중무휴 행운분식 이야기는 브런치북과 브런치매거진 이렇게 둘로 나누어 연재됩니다. 그 곳에서 더 많은 에피소드를 볼 수 있어요. 언제나 시간을 내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팟캐스트에서 에피소드를 낭독하고 비하인드 스토리도 이야기하고 있어요. 함께해요. 

http://www.podbbang.com/ch/1774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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