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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Nov 17. 2019

아버지가 나에게 실망한 이유

 나는 스펙업이라는 N포털 카페에 들어갔다. 노트북 앞으로 무심하게 턱을 괸 채. 전체글보기를 클릭하고 주르륵 스크롤바를 내리자 반은 대기업의 채용일정이었고, 반은 나와 같은 취업준비생들의 고민상담 게시물이 줄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제품처럼 자신들의 스펙을 나열하며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올해 인서울 4년제 행정학과를 졸업할 예정입니다! 학점은 4.2정도 되고 토익은 920점입니다. 그런데 토익점수 유효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재시험을 봐야 할 것 같아요ㅜㅜ. S은행 대학생 홍보대사를 한적 있고, T커피 프랜차이즈 마케팅 공모전에서 수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사 자격증과 금융 3종 자격증은 이미 땄고요!! 이번에 금융권 공채를 노려보고 있기는 한데, 여기서 제가 부족한 것은 무엇일까요? 말씀 좀 부탁드릴게요ㅜ.


게시물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쉬었다. 나보다 높은 학점과 토익점수를 가지고 있으며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한 것 같은 친구가 자신의 부족한 점이 무엇이냐며 묻고 있었다. 조용히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수북이 쌓여서 뒤로 넘어간 수많은 게시물들을 클릭하고 또 클릭해도 토익점수와 가고 싶은 대기업명만 바뀌어있을 뿐 모두 비슷한 내용이었다. 나는 대뜸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스펙이 놓은 저들도 대기업을 못 가는데 내가 어떻게 가지, 아니 정말 갈 수는 있을까? 나는 끝도 없이 남들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서울 화양동에 있는 4년제 대학교, 그곳은 나의 모교였다. 입학 때도 당당히 들어갔으니 졸업도 역시 당당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대기업 입사 소식이 필요했다. 어떤 부서든 가리지 않으니 인지도 있는 대기업, 그 타이틀이면 되었다. 내가 아는 선배들은 모두 공무원 아니면 대기업에 입사했고 동기들도 하나둘씩 SNS에서 자신들의 취업소식을 올리기 시작했으니까. 그게 아니면 나는 사회의 낙오자나 다름없었다. 나도 빨리 입사에 성공해 SNS에 나의 입사 소식을 반드시 업로드시켜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이 들었다.


노트북을 덮고 나의 이력을 주욱 훑었다. 평범한 학점과 겨우 졸업할 정도의 토익점수를 가진 나에게서 볼만한 건 그동안 열심히 해왔던 기업홍보대사 활동들 뿐이었다. 나는 펜 끝을 이로 질겅질겅 씹으며 여기서 더 추가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더 이상의 홍보대사활동은 과해 보였고, 자격증을 따기에는 준비할 시간이 부족해 보였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담당자라면 유관 업무 경험자를 원하지 않을까? 그래, 그럼 인턴을 한번 지원해보자.


그렇게 결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휴학을 하고 서대문역에 위치한 홍보대행사 PR3팀 인턴으로 취업했다. 원래는 인턴도 대기업 쪽으로 찾아보았는데 그 역시 높은 경쟁률을 가지고 있었고 갖춰야 하는 스펙 또한 만만치 않아 울며 겨자 먹기로 홍보와 마케팅 쪽 중소기업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쉬웠다. 하찮은 인턴이라도 대기업이었다면 SNS에 자랑스럽게 올릴 수 있었을 텐데.


인턴은 나 말고도 남자 동기 두 명이 더 들어왔다. 그러나 그들은 나와는 달리 꽤나 진지하게 이 직장을 선택한 듯 보였다. 오리엔테이션을 받으며 이런저런 말을 들었는데 사실 말만 인턴이지 정규직이나 다름없었다. 인사담당자는 인턴이라는 직급을 달아야 중소기업인 자신들에게 정부지원금이 나온다고 했고, 3개월 뒤에는 무리 없이 정규직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은 나에게 어떠한 감동도 줄 수 없었다. 인턴직 자체가 대기업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었기 때문에 이건 나에게 단 한 줄의 스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아버지, 인턴으로 취업했어요.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한 딸의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엄청 좋아하셨다. 아버지와 사는 이십여 년 동안 그런 밝은 표정과 달뜬 목소리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나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딸의 첫 회사생활이 대기업이 아닌 고작 중소기업인데도, 월급이 150만 원밖에 안되는데도, 정규직도 아니고 인턴인데도 어떻게 좋아할 수가 있을까. 그런데 그런 아버지의 반응을 보고 계획에도 없는 이야기를 나도 모르게 흘려버렸다.



말이 인턴이지, 3개월 후에는 자동으로 정규직 된데요.



그럴리는 없겠지만 제발 다녀달라고 그 중소기업 사장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져도 미련 없이 그만둘 거면서 나는 아버지의 웃음과 표정이 좋아 그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속으로 3개월 후에 어차피 제 손으로 그만둘 거지만요, 라는 말만 삼킬 뿐이었다.


3개월의 시간은 빠르게 지나갔다. 겨울은 어느새 완연한 봄이 되었다. 당시 홍보회사에서는 광고성 기사를 써서 신문에 배포하는 일을 주로 하였는데 글쓰기에 재능이 있던 나는 기사의 헤드를 뽑는다거나 주어진 기사를 쓰는 일에 재미를 붙였고, 같이 입사한 동기들과 비교해 좋은 칭찬도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든지 말든지 마음속으로 이 회사는 나의 종착지가 아니라는 생각에 늘 사로잡혀서 그저 인턴기간에만 최선을 다할 요량만 가득했다.


그리고 나는 홍보업무 말고도 이 회사에서 보이지 않는 여러 가지의 것들을 알아가기 시작했다. 첫 번째, 월요일과 금요일은 연차를 내면 안 된다는 것. 둘째, 막내가 칼퇴근을 하면 안 된다는 것. 셋째, 칼퇴근을 하려면 내 주위의 누군가가 죽어야지만 내가 죽을상을 하며 나갈 수 있다는 것. 넷째, 근로자의 날에 워크숍을 가도 아무 불만이 없어야 한다는 것 등이었다. 첫 사회생활의 시작에서 희망보다는 불만이 많은 축에 속했지만 그것 또한 상관없었다. 내년이면 대기업에 가있을 테다. 대기업은 이렇게 지질하게 회사를 운영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버지에게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말은 부러 하지 않았다. 아마도 내 눈가에 막내딸의 취업소식에 얼굴이 벌게지도록 좋아한 아버지의 표정이 선연했고, 귓가에는 그의 들뜬 목소리가 맴돌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후 나는 낮에는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것이 끝나면 만료된 토익점수를 다시 따기 위해 토익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저녁에는 자기소개라는 소설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그동안 공채 소식은 어김없이 쏟아졌고, 동기들이 취업에 성공했다는 게시물도 심심치 않게 업로드되었지만 그곳에 내 자리는 없었다. 자기소개 소설 백여 개를 죽어라고 넘게 썼는데 말이다.




자취방 옥상에 올라가 어두운 도시의 밤을 보면 회사가 참 많았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나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나는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만 터덜터덜 걷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좀비같이 자소설을 쓰고 있을 때쯤 자취방에서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회사를 잘 다니고 있냐고 물었고,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상사는 잘해주는지 물었다. 나는 간간히 전화를 해주었던 아버지에게 점심시간이다, 상사가 부른다는 말로 둘러대기 일쑤였는데 그 날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마침내 아버지에게 회사를 그만두었다고 이야기하였다.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왜 그만두었니, 무엇 때문에, 누가 괴롭혔니, 일이 맞지 않았니 이런 이야기들도 전혀 하지 않았고 나 또한 별다른 핑계를 대지 않았다. 사실은 대기업을 입사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지 않은 별 의미 없는 직장이었다고, 아버지도 나에게 직면한 치열한 취업시장의 상황을 안다면 이해할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사실 말한다고 해서 나와 다른 삶을 살아온 아버지가 이런 환경들을 이해해줄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도 마음 한편에 있었다. 아빠와 나의 침묵은 꽤 오래갔는데, 먼저 입을 연 건 아버지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하시고 전화를 끊으신 뒤, 오랜 기간 동안 나를 마주해도 시선을 피하시거나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만두었구나. 우리 딸…. 그런데 아버지가 좀 실망했네. 끊자.









아버지는 오십 년대 후반에 태어났다. 구 남매의 여섯 번째 아들이었는데, 당시의 대부분의 가정이 그랬듯이 형편이 여의치 않아 배움보다는 가계의 생계를 유지하는데 일조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돈을 번다는 의미는 자아실현이 아닌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라든가 생존의 개념과도 같았다.


어릴 때는 국민학교 앞에서 아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어떤 간식거리를 팔거나 동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과일을 팔기도 했는데 성인이 된 이후로는 구로동의 한 가방공장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는 윗사람의 밑에서 아랫사람은 납작 엎드리고 기어야 하는 게 당연했다. 근로기준법은 있어도 없는 것이었고, 노동자의 권리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납득이 안 가는 상황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건 곧 제발 저를 이곳에서 쫒아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고 그러면 월급이 끊길 테고 결국에는 생존에 위협을 받을 것이 뻔했다.


아버지는 가방공장에 다니는 상사가 던진 가위에 머리를 맞아 피부가 찢어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송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잘하겠습니다.라고 허리를 숙여야 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끝에는 그게 사회생활이라고, 은주 너도 회사에서는 상사에게 깍듯이 대하면서 제가 잘하겠습니다. 제가 처음이라서요, 이해 좀 해주세요. 대리님, 죄송합니다.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고 더 정신 바짝 차리겠습니다.라는 말을 달고 살아야 한다고 했다. 그래야 회사를 오래 다닐 수 있다고.


입사 이후로 이런 말을 줄곧 해주시던 아버지에게 나는 내 취업사정에 대한 어떤 이해도 바라지 않았고, 대화보다는 스스로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그와 내가 살아온 시간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그저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가릴 것 없이 월급 따박따박 주는 회사만 취업하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말하는 아버지를 마음속으로 당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보기 좋게 대기업 입사에 실패했다. 어느 전자회사의 마지막 불합격 통보를 끝으로 완전히 미련을 버렸다. 나는 현실과 타협했고 전공과 대학교 학생회 경험을 살려 어느 중소기업의 인사팀 신입사원으로 너무나도 허무할 정도로 쉽게 입사할 수 있었다. 어떤 대통령이 청년실업률에 대해 그저 눈이 높아서라는 말을 했다던데, 그 말이 정말 맞나 싶은 순간이었다.


이번에도 홍보회사에 입사했던 때와 같이 SNS에 취업소식을 올릴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 당시 인턴을 할 때와는 느낌이 달랐다. 직원도 300명이나 되었고, 매출액도 높고, 연봉도 만족했다. 그리고 부서 이름 역시 너무나 멋진 HR그룹의 인사기획팀이었다. 인지도는 조금 떨어지지만 뭐 그게 어때서라는 생각이 들었고 마음속 자부심이 가득했다. 부모님 앞에서도 나는 행복한 모습을 숨기지 않았다. 그때 역시 우리 아버지는 내가 처음 홍보대행사의 입사 소식을 전했을 때처럼 진심으로 축하를 해주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참 간사했다. 대기업 입사의 발판으로 이용한 중소기업 인턴 자리를 박차고 나갈 때는 아버지가 절대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으면서 결과적으로 중소기업에 입사하니 마음이 달라졌다. 그저 아버지가 막내딸에게 대기업 취업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떻냐고, 복잡한 생각은 하기 싫었다. 아버지와 내가 웃고 있으니 그거면 되었다.


그렇게 6개월 정도가 지났을까, 입사 당시 행복감에 젖어 자연히 지어진 미소는 사실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 미소는 커녕 회사 화장실 구석에 틀어박혀 우는 날이 허다했다. 그때의 나는 바로 위 직장상사와의 트러블을 겪고 있었다. 상사로부터 인수인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탓에 헛수고를 하는 날이 많았고, 결재는 늘 반려되었으며 신입사원이라 실수 또한 빈번했다. 나는 점점 능력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고, 자존감은 완전히 바닥을 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그만둘 수는 없었다. 입사해서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면 쟨 역시 이상한 애였어,라고 회사 사람들이 손가락질할 것 같았고, 또 어떤 이유로든 퇴사를 한다면 아버지가 또 실망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야근과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기어코 건강에 빨간 신호가 켜졌다. 어느 날 ‘결재서류’라는 글자를 보는데 ‘결 류’라고 보였던 것이다. 눈을 문지르고 안경을 다시 닦아 써봐도 그대로였다. 좀 쉬면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했지만 그 현상은 주말이 지나도 계속되었다. 결국 나는 회사에 사정을 말하고 병원에 가기로 했다. 병원에서는 눈 검사에 앞서 안약을 넣어야 한다고 했고, 그러려면 눈이 일시적으로 불편하게 보일 수 있기 때문에 보호자를 대동해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날, 아버지와 함께 병원을 갔다.


의사의 종합적인 판단은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장애였다. 그는 무덤덤하게 스트레스받는 일 있어요,라고 물었지만 내가 대답할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저 조금 쉬고, 스트레스를 받을만한 일을 하지 않으면 된다는 조금은 무책임한 말을 한 뒤, 처방전을 내어줄 뿐이었다. 몸이 좋지 않은 나는 자취방으로 가지 않고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본가로 향했다. 그 날, 경인고속도로는 밀렸고 아버지와 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갔다. 그리고 마침내 도로 한가운데에서 아버지가 물었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니?



그런데 그 한마디가 대체 뭐라고 나의 고개를 숙이게 만든 것일까. 나는 무너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구 눈물을 흘리며 방언 같은 이상한 말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버지, 사실은 회사에서 이런 취급을 당하고 있어, 팀장과 대리들은 나를 회의에도 끼어주지 않고, 가끔은 성희롱을 하고 그러더라. 업무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아서 우리 팀도 아닌 다른 애먼 사람들한테까지 돌아가며 혼나고 있어. 근데 사실은 업무를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 게 아니라 내가 부족한 게 아닌가 싶어. 다른 사람이 이 자리에 들어왔다면 더 잘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아버지, 아버지가 가르쳐준 것처럼 다음에는 제가 더 잘하겠습니다. 실수하지 않고 정신 더 바짝 차리겠습니다,라고 말을 했는데도 그런 상황이 반복돼. 그러고 나면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겨우 화장실에서 우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어. 그렇게 매일 혼자 감정을 주워 담는 게 일상이 돼버렸어. 사람도 힘들고, 업무도 힘들고, 매일 열한 시까지 남아있는 나도 체력적으로 버틸 수가 없었어. 그래서 눈이 이렇게 됐나 봐.


운전대를 잡은 아버지는 말이 없었다. 차 안에는 나의 울음소리만이 가득할 뿐이었고, 아버지는 휴지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흥, 하며 코를 풀었다. 하지만 조금의 침묵을 깨고 아버지에게서 돌아온 말은.



그런 곳에서 맘고생하지 말고, 그만둬라. 아버지가 밥도 해주고 용돈도 주면서 그렇게 살면 되지 뭐.



사실 눈물을 흘리고 있던 나는 아버지에게 혼날 각오를 하고 있었다. 회사란 다 그런 거야, 남의 돈 벌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아냐, 라는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한 말은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그러고 나니 사실은 내가 아버지에 대해 건방지게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지금까지 홍보대행사를 퇴사한 후 아버지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고 시선을 마주하지 않은 이유는 내가 그의 가르침과는 달리 지구력 없이 버티지도 못하고 회사를 박차고 나온 나약한 딸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나는 일 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나에게 실망한 이유는 퇴사를 해서가 아니라 힘든 고민거리를 나누지 않은 그 과정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라는 걸.



나는 편협한 사람이었다. 아버지와 나는 치열함의 시대에서 살아왔고 물론 그 온도는 똑같이 뜨거웠다. 하지만 그 결이, 그 종류가 애초에 다르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생존을 향한 치열함이었고, 나는 더 나은 삶의 행복을 위한 치열함이라고. 우리의 나이는 서른두 살이나 차이가 나고, 각자의 시대에서 너무나도 다르게 살아왔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회사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살아온 시대가 다르다고 해서 그러니까 그 치열함의 종류가 다르다고 해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이제 직장생활 6년 차에 접어든 나는 하루의 일과를 아버지에게 말하곤 한다. 오늘은 팀장이 지랄을 하더라, 꼼꼼한 건 좋은데 진짜 변태같이 꼼꼼하더라, 오늘은 그분과의 대화가 조금 힘들었다, 뭐라고 들이받으려다가 카드값을 생각하고 참았다,라고 하면 아버지는 허허허, 웃는다.


그러면 아직도 그는 팀장님 말 잘 들어야 한다, 그 자리까지 올라간 그분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라는 말씀을 하시곤 한다. 난 이 이야기를 듣고 예전 같으면 아버지가 뭘 알아, 나와 같은 조직을 그리고 환경을 겪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라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아버지도 아버지의 시대에서 나름대로 비슷한 상황을 대면해왔다는 걸 인정한다. 물론 그의 말이 모두 다 맞을 때만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는 회피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의견이라고 생각하며 존중한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말은 세월이 지나 몇 번을 정리한 후 당신 나름대로의 탈고를 끝낸  보고서의 결론이니까.




나는 왜 그동안 이 간단한 진리를 몰랐을까.

아버지와 나는 대화가 필요했다는 걸.

서로의 시대를 초월해 ,

서로를 이해할 수 있고,

가끔은 서로를 이해시킬 수 있는 아버지와 딸 사이의 그저 그런 대화를 나는 이제라도 할 수 있다는 게 너무나도 행복하다.







<공지>

24시 연중무휴 행운분식 이야기는 브런치북과 브런치매거진 이렇게 둘로 나누어 연재됩니다. 그 곳에서 더 많은 에피소드를 볼 수 있어요. 언제나 시간을 내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팟캐스트에서 에피소드를 낭독하고 비하인드 스토리도 이야기하고 있어요. 함께해요. 

http://www.podbbang.com/ch/1774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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