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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Nov 26. 2019

안녕, 나의 다복이.

15년된 나의 차를 떠나보내며.

2018년의 어느 겨울, 나는 미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마치 찬바람이 마음안에 뭉근하게 불어오다 이내 평화를 되찾았다가 다시 또 확 돌풍을 일으키는 느낌이랄까. 나는 여느 주말 아침과 같이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렸다. 책상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을 일부러 쳐다보지않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플레이리스트가 멈추고 벨소리가 울렸을 때, 나는 그릇을 닦던 움직임을 멈추고 식탁으로 향했다. 곧, 한껏 기대에 부풀은 어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차 받으러 온 사람인데요! 양재동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맞다. 그 날은 나의 구형 SM5가 새주인을 만나는 날이었다. 그에게 내가 지어준 이름은 일명 다복이. 이미 삭을대로 삭아버린 기어를 감싼 가죽은 그의 나이가 얼마나 노쇠한지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가 우리가족과 함께한 세월은 15년, 그 중 나와 함께한 세월은 4년 남짓이었다. 








자, 키 받아라.



그러니까 4년 전, 내가 회사에 들어간지 얼마되지않았을 때였다. 아버지는 당신의 차를 바꾸시면서 나에게 다복이를 넘겨주었다. 아버지는 그러면서 이 차가 얼마나 대단한 차인지 일장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은주야, 이 차는 말이야, 나오자마자 아주 대한민국에서 혁신을 일으킨 차야. 자동차 좀 안다는 사람은 다 안다? 이건 명품이거든. 이 차는 전부 다 부품이 일제야. 그리고 이 모델 이후로 나온거는 다 국산부품이야. 지금은 국산부품 전부 다 좋지만 그 때는 일제라면 이걸로 쳐줬어. 아으아주 아주 명차야. 그리고 이건 LPG차야, 그래서 기름값도….





아버지는 엄지를 치켜세우며 다복이를 칭찬했다. 사실 나는 뭐…, 조금 심드렁했다. 아버지가 뭐라고 하시건간에 차에 대해서 일도 모르는 나에게는 그저 10년이 넘은 차, 딱 그거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문을 열고 내부를 살펴보았다. 와우…, 이 차에는 블루투스와 같은 신기술은 없었다. 카오디오에는 여섯개의 버튼이 있었는데 하나하나 버튼을 누르면 이미 아버지가 셋팅해놓은 라디오가 흘러나왔다. 재밌었던건 FM보다는 AM이 많았고, 교통방송과 KBS1 방송이 주로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는 것이다. 


시디롬은 고장나 있었지만 그 안에 어떤 시디가 언제부터 들어가서 안나왔는지는 나도 안다. 그건 바로 작은언니거였다. 몇 년전, 기분이 우울하다고 드라이브를 한다면서 언니는 아버지의 차키를 가져갔다. 하필이면 그 날 언니는, 내게 강 같은 평화를 선사하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싶어 서점에서 비싼돈을 주고 시디를 사 그곳에 넣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다복이는 그 음성을 들려주기는커녕 씹어삼켜버렸다. 그 때, 다복이는 잠들어있던 작은언니의 체대본능을 깨워주었고 아주 격하게 몇 대 맞았다. 우울이 분노로 바뀌는 순간이었고, 다복이 아니라 박복으로 잠시 개명이 되는 순간이었다. 


그 외에도 스마트키가 아닌 차키로 시동을 거는 시스템, 콘솔박스를 열면 줄줄이 그 존재감을 드러내었던 아버지의 고속도로 휴게소 테이프, 다소 50대스러운 뒷좌석의 방석들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속으로 말했다. 한 1년만 타고 다른 이에게 얼른 보내줘야겠다고.


그래도 차는 차였다. 나는 면허를 딴지 6년이 지나 오너드라이브가 되었다는 기대감에 조금은 들뜨기도 했다. 그 시절의 나는 직장에서 밥을 먹으면서 그리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마침내 나도 차가 생겼다고 말하고 다니긴했다. 물론, 몇 년식인지 또 어디가 어떻게 고장났는지는 나와 다복이만이 아는 비밀이었다. 


1년만 타겠다는 차를 어쩌다보니 4년이나 탔다. 그동안 다복이는 꽤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여름에는 에어컨을 켠지 오분이 지나도 전혀 시원해질 기미가 보이지않았고, 그마저도 오르막길을 올라가야할 때면 힘이 딸려 컥컥대는 바람에 에어컨을 꺼야했다. 아, 그렇지만 이 시대의 혁신이라고 자부하는 아이폰과의 공통점도 있다. 바로, 추운 겨울날 시동이 잘 켜지지않는다는 것…. 하하, 엄청난 매력아닌가?





하지만 다복이를 마냥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그와 내가 함께한 세월이 무려 15년이나 되기 때문이었다. 다복이는 나의 교복을 입은 모습과 정장을 입은 모습까지 모두 다 알고있다. 


중학교 시절, 엄마는 아침장사가 바쁘면 도시락을 챙겨주지 못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 날 점심에 교문 앞으로 나를 찾아왔다. 하얗게 빛나는 다복이를 끌고. 그리고 창을 내려 김밥이 담긴 검은봉지를 내밀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다복이와 더 많이 함께했다. 집앞 5분거리의 고등학교를 1지망으로 써서냈으나 신의 장난으로 40분이나 떨어진 고등학교를 배정받은 것이다. 신설학교인 탓에 버스노선도 없던 시절, 아버지와 나는 매일 아침과 저녁을 함께했다. 그 때, 다복이는 소리새의 ‘그대, 그리고 나’라든가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 같은 노래를 들려주었다. 


대학교 시절에는 다복이가 나 때문에 고생이란 고생은 다 겪었다. 그 때는 면허를 딴지 얼마되지않아 아버지와 인천 계산동에서 서울 화양동까지 머나먼 거리를 왕복하며 운전연수를 하곤했다. 그러면 다복이는 수많은 급정거와 초보적인 끼어들기 수준을 모두 감내하곤 했다. 


그리고 다복이가 늙은 모습으로 완전히 나라는 주인을 만난 후, 나는 그 안에서 참 많이 웃기도 울기도했다. 운전을 못하는 남자친구를 옆에 태우고 한강주차장에서, 잠실자동차극장에서 수많은 데이트를 하며 웃었다. 반대로, 직장에서 실수를 해서 상사에게 꾸지람을 들은 날은 그 안에서 핸들을 붙잡고 서럽게 울었다. 그 때 다복이는 세상의 제일 어둡고 구석진 곳에서 늘 나와 함께했다. 아마도 다복이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알지않을까. 





어느덧 시간이 지나고나니 다복이는 기계가 아니라 나와 인생을 동반하는 친구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다복이를 새로운 주인에게 보내기가 싫었는지도 모른다. 마지막 날 본 그의 계기판에는 18만키로라는 숫자가 적혀있었다. 그와 우리가족이 함께한 모든 거리였다. 왜 하필 18만일까…, 하하. 다복이가 욕이라도 하는걸까 싶었지만 그게 그놈의 성격이려니 한다. 



다복아, 너에게 1년만에 편지를 쓴다. 새로운 주인이 잘 해주니? 그분이 하얀색 번호판도 가지고 오셨던데…, 이제 그 오래된 초록색 마스크도 안녕이구나. 


나는 새로운 친구를 만났어. 그 아이 이름은 복순이야. 너와는 다르게 에어컨도 잘 나오고 오르막길도 잘 올라가. 그리고 열쇠로 시동도 안걸어도 돼. 근데 말이야, 가끔 너랑 쌍둥이처럼 생긴 차들을 도로에서 만나면 너가 생각나. 있을 때 잘해줄걸…, 뭐 그런 생각도 들어. 왜 나는 너를 병원에도 잘 안데려다주고 목욕도 잘 시켜주지않았을까. 나는 참 무심한 주인이었어. 그치?


가끔 너가 그립다. 아니 솔직히…, 너가 그리운건지 내가 그리운건지 모르겠어. 그 때는 너가 나고, 내가 너였으니까. 다복아, 누군가에게는 그저 흔하고 흔한 고철덩어리일지는 몰라도 나는 아니야. 나는 아직도 너를 기억할만큼 너와 함께한 모든 날들을 사랑해. 오래오래 건강해. 






<작가의 말>

다들 애착이 가는 차 하나쯤은 있으시죠? 저에게 다복이는 그런 존재더라구요. 




<공지>

1. 24시 연중무휴 행운분식 이야기는 브런치북과 브런치매거진 이렇게 둘로 나누어 연재됩니다. 그 곳에서 더 많은 에피소드를 볼 수 있어요. 언제나 시간을 내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 링크 ▽ 이 글의 낭독버전을 팟캐스트로 듣고싶으시다면? (비하인드스토리 포함)

http://www.podbbang.com/ch/1774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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