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여느 평범한 날이었다. 당시의 나는 세일러문을 보고싶다는 마음만 가득 차있는 순진한 초딩이었다. 그리고 마침 오늘은 세일러 비너스라는 새 인물이 나올 거라는 소문이 친구들 사이에서 파다했다. 학교가 끝난 후, 나는 기필코 그 장면을 놓칠 수 없다는 일념 하나로 엘리베이터 문이 양쪽으로 갈라지자마자 숨이 차도록 내달렸고 마침내 현관문이 열렸다. 그런데, 막상 집으로 들어선 나의 시선을 빼앗은 것은 티브이가 아니었다. 그건 생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책상 위에 올려진 네모난 회색 물건 두 개. 그중 하나의 상자에서는 티브이와 같은 파란 화면이 나오고 있었다. 물론 그건 티브이가 아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상자는 빌 게이츠가 세계적인 혁신을 일으킨 윈도우 95를 탑재한 컴퓨터였고, 아버지가 무려 그 당시 돈으로 128만원의 거금을 주고 사 온 것이었다.
잠시 후, 나는 세일러문의 존재는 완전히 잊어버린 채 아버지가 하는 것만을 옆에서 뭔가에 홀린 것마냥 지켜보았다. 아버지는 의자에 앉아 목을 쑤욱 빼고는 손에 뭔지 모를 하얀 물건을 그러쥔 채 흔들어대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버지의 손이 ‘딸깍’ 하고 움직이면 화면에 있는 하얀 점도 동시에 움직였다. 뾰족한 그 모양새는 이내 도장 모양으로 바뀌다가 뱅글 돌기도 했다. 헉, 이게 뭐야…. 나는 너무 놀라서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나 그다음 아버지가 꺼내신 말에 나는 더욱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건 바로.
은주야, 이거 어떻게 끄는 거냐.
하하. 그렇다. 우리 아버지는 사실 컴퓨터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무려 128만원이나 주고 그것을 집에 들인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바로 누군가가 그 당시 아버지의 최대 관심사였던 ‘주식거래’를 여의도에 가지 않고 집에서 직접 할 수 있다는 말을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턱대고 아버지가 컴퓨터의 컴자도 모르면서 그것을 집으로 가지고 온 바로 그 날, 우리는 이 기계의 전원을 끄기 위해 무척이나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그러나 생전 컴퓨터라는 물건을 처음 보는 두 사람이 그것을 해결 할리가 없었고, 우리는 결국 어느 친척에게 전화를 걸어 이 기계를 대체 어떻게 끄는 건지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찾던 ‘종료’는 다름 아닌 ‘시작’이라는 버튼에서 찾아야만 했다. 우리는 이 말도 안 되는 프로세스를 설계한 빌 게이츠를 끝끝내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2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것은 우리 아버지에게 난제로 남아있다.
그리고 그다음 날, 결국 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컴퓨터학원으로 향했고 그때부터 나는 세일러문 대신 한컴타자연습과 친해져야 했다. 나는 그 덕분에 밀레니엄 시대가 오기 전부터 워드프로세서 1급을 딸 수 있었고, 프로그래머가 아닌데도 마이크로소프트 액세스로 코딩을 했으며, 직장인이 아닌데도 함수를 쓰며 엑셀을 했다. (아직도 그걸 대체 왜 배웠는지 모르겠다.)
이후, 내가 자라는 동안 아버지는 컴퓨터 앞에서 나를 참 많이도 불렀다. 진짜다. 진짜 많이 불렀다. 그리고 많이 물었다. 이건 어떻게 하는 거냐, 저건 어떻게 하는 거냐,라고. (누가 그랬던가, 이름은 부른다고 닳는 것이 아니라서 참 좋다고. 아니다. 난 차라리 닳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닳고 닳아서 아버지가 제발 내 이름을 그만 불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버지는 내 이름을 참 많이 불렀다.)
또, 행운분식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백프로의 확률로 그 날 저녁에는 나를 꼭 불렀다. 왜냐고? 가령 이런 것들 때문이었다. 새로운 메뉴가 나왔으니 그것을 워드로 찍어달라거나 낮시간에 일하는 아줌마가 그만두었으니 구인공고를 인쇄해달라는 부탁들. 나는 그럴 때마다 [신메뉴 황태해장국 – 3,500원] 또는 [아줌마구함 016-XXX-XXXX 으로 연락바람] 이라는 내용을 빨간 글씨로 찍어서 아버지에게 건네주었다.
뭐, 사실 그건 별로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래, 정말 별 것 아니었지. 그런데도 아버지는 프린트에서 마침내 인쇄되고야 마는 A4용지의 벌건 글씨를 보면서 기쁘게 웃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역시, 우리 딸 최고다! 내가 정말 잘 키웠다!라고. 나는 아버지가 그러실 때면 뭐, 이런 걸 가지고, 라는 표정을 짓곤 했지만 다음 날이면 여지없이 교복을 입은 채 행운 분식에 들렀다. 그리고는 엄마를 찾는 척하면서 곁눈질로 벽을 싹 둘러보곤 했다. 그 촌스러운 벽지에는 어제 내가 아버지에게 준 결과물이 싸악 코팅된 채로 예쁘게 걸려있었다. 그러면 나는 헤헤, 하며 슬며시 남모를 웃음을 짓곤 했다.
그런 내가 아버지의 부탁을 조금씩 귀찮아하기 시작한 시기는 바로 사춘기 이후부터였다. 그때부터 아버지의 요청이 꽤나 복잡해졌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한글로 몇 자 적어서 인쇄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공인인증서를 새로 깔아달라, 액티브엑스를 설치해달라, 컴퓨터가 느려지는데 이건 왜 그런 거냐, 혹시 해커가 내 컴퓨터를 해킹한 것이 아니냐(왜? 해커가 아버지의 컴퓨터를 왜?), 혹시 싹 지웠다가 다시 깔면 좀 빨라지냐, 한게임 고스톱을 깔아달라, 증권 프로그램을 깔아달라….
해주긴 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내 태도는 나빠졌다. 아버지 앞에서 대놓고 한숨을 쉬기도 하고 그러다가 짜증을 내었고, 답답한 마음에 언성을 높이며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러다 결국, 몇 해가 지나도록 컴퓨터를 다룰 줄 모른다는 진짜 같잖은 이유로 아버지를 무시하기까지 한 적도 있었다.
그때, 나는 아버지가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렸을 적, 나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세상에서 모르는 것이 없었던 가장 완벽한 지성인이었는데 언젠가부터 그의 입에서는 모르겠다, 선생님에게 물어보아라 라는 대답을 넘어 이건 어떻게 하는 거냐, 나는 모르니까 은주 네가 해달라…, 라는 요구가 많아졌다.
하지만 아버지의 모습만이었을까, 변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예전에는 아버지가 무언가를 시키면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달음에 달려가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었다. 그리고는 눈을 맞추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곤 했고 칭찬의 말이 돌아오면 그게 또 좋아서 배시시 웃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몸이 커버린 나는 누워서 ‘예’라는 대답 대신에 ‘왜, 또’라며 짜증 섞인 물음표를 던지는 건방진 아이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아버지는 또 나를 불렀고, 또 나를 불렀고, 또 나를 불렀다. 그럼 나는 또 화를 내었고, 또 짜증을 내었고, 또 소리를 질렀다.
그런 아버지의 부름에서 조금 자유로워지기 시작한 건, 대학교에 들어가 자취를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이제는 물리적 거리가 멀어졌으니 아버지가 나에게 물어볼 빈도가 줄어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래도 그즈음의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삼화고속 9500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향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아버지는 어김없이 나에게 5일 동안 꾹꾹 참고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세례를 쏟아부었다. 그러면 나는 처음에는 아버지의 질문을 조금씩 받아주는 척을 하다가 주말에 고향 친구들과 잡아놓은 약속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도망을 치곤 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내가 부모님을 찾아뵙던 시간은 이주에 한번 그러다 한 달에 한 번씩으로 바뀌어 갔다. 꼭 아버지 때문은 아니었고, 시험을 보다 보니,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니, 취업을 하다 보니, 뭐 그런 식으로 비슷하게 살다 보니 또 그런 식으로밖에 찾아뵙지 못하게 되었다. 절반은 사실 핑계다.
그러나 이런 부족해빠진 나에게도 숙명적으로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찾아왔다. 그리고 그건 꽤 예상치 못한 시점이었다. 음…, 그러니까 그 날은 취업을 한지 얼마 되지 않은 내가 회사 컴퓨터 앞에 앉아 무언가에 한참 집중을 하고 있을 때였다. 사실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반복된 실수로 인해 회사 상사에게 꾸지람을 들은 탓이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잘해야지…, 한번 더 실수하면 정말 미운털이 제대로 박힐 거야,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하지만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고 그 주인공은 아버지였다. 나는 전화기를 들고 회의실로 들어갔다.
응, 아부지.
회사니? 전화되니?
어.
은주야, 미안한데 아빠가 이걸 꼭 해야 하거든. 이것만 알려줄 수 있을까?
뭔데요..., 일하는 중이니 빨리 말해요.
알았어. 미안하다, 우리 딸. 내가 글을 다 썼는데, 제목을 안 썼어. 혹시 제목을 삽입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니?
그 순간…, 나는 아버지에게 정말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또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그리고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이렇게 말했던 것 같다. 꼭 그걸 지금 물으셔야 햐냐고, 아버지는 컴퓨터도 못하면서 왜 그걸 손으로 하지 않고 매일 컴퓨터로 쓰려고 하냐고. 아버지는 손으로 쓰는 게 더 빠를 거라고. 정말 그걸 쓰고 싶다면 제발 나한테 묻지 말고 학원을 좀 다니시라고. 아버지, 난 아버지가 이럴 때마다 너무 힘들다고.
잠자코 내 말을 듣고 있던 아버지는 미안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화를 끊었다. 문자도 왔다. 또 미안하다고 했다. 정말 별것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일에 집중하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는 아버지가 미웠다. 대체 아버지는 그게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일하는 나에게까지 전화를 한 걸까. 아니, 사실은…, 그래 사실은 밉지 않았다. 그냥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싶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그게 아버지였던 거다. 아버지는 만만하니까. 직장상사가 아니니까. 화를 내도 도리어 나에게 화를 내지 않으니까. 그때의 난 참 찌질하고 못난…, 사춘기에서 성장이 멈춰버린 철없는 딸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주워 담기에는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며칠 뒤, 나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본가를 찾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버지와의 어색한 기류는 없었다. 어차피 이런 일은 그와 나 사이에서 비일비재하게 반복되는 일이었으니 별다른 사과도 별다른 말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사실 내가 그 날 본가를 찾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아버지가 나에게 당신이 10년 넘게 타시던 차를 완전히 넘겨주던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마도 나는…, 그래 아마도 나는 그 차가 아니었다면 굳이 계산동에 가지 않았을 거란 걸 스스로 알고 있었다.
꽤나 기회주의적이고 이기적이기만 했던 나는 아버지에게 대충 차에 대한 설명을 듣고 키를 받아 든 후 내가 사는 집으로 미련 없이 향했다. 아버지는 차가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불안한 눈빛으로 내가 운전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사고가 날까 싶은, 물가에 아이를 내놓은 아버지 심정의 눈빛. 딱 그거였다. 나는 백미러로 사라지는 아버지의 모습을 뒤로한 채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아이고, 참 귀찮고만.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자동치 실내등을 켰다. 그리고 글로브 박스를 열어 아버지가 넣어놓은 몇 개의 서류들을 살펴보았다. 거기엔 아버지가 말한 대로 자동차등록증 그리고 보험회사 번호가 있는 약관 뭉치가 있었다. 그리고 꾸깃한 A4 용지도.
뭐야…, 웬 종이. 나는 별다른 의문 없이 아버지가 말한 종이를 펼쳤다. 하지만 나는 이것으로 말미암마 이십 년 전부터 컴퓨터 실력이 늘지 않는 아버지를 무시한 과거의 나에게 무한한 질타를 보내야 했다. 아니, 이십 년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불과 며칠 전의 나를 찾으면 될 일이었다.
사실 그 종이는 별게 아니었다. 그리고 꽤나 엉망이었다. 오타도 많고, 한눈에 알아볼 수도 없고…. 그런데 그냥 목이 매였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뜨끈해지기도 했다. 나는 짓눌린 목소리로 혼잣말을 하며 핸들을 끌어안았다.
아 정말…, 아부지 이런 건 왜 만들어가지고 사람을 이상하게 만들어….
거기엔 아래하한글로 작성한 ‘초보자 안전수칙’이 있었다. 분명히 독수리타법으로 두 시간 이상은 걸렸을, 들여 쓰기조차 할 줄 모르는, 딜리트 키를 사용할 줄 모르는, 하지만 제목은 꼭 쓰고 싶어 막내에게 전화를 건 어느 오십 대의...
(그 내용은 아래 사진으로 대체합니다.)
<작가의 말>
무려 6년 전 일이네요. 요즘도 아버지 컴퓨터는 참 느려요. 그런데, 저는 아직도 철이 덜 들어서 아버지 컴퓨터를 잘 봐주지 않아요. 어려운 것도 아닌데 왜 잘 안될까요.
쓰면서 느낀건데, 자식이란 부모 앞에서 한없이 모자라면서도 당당한 존재이고, 부모는 자식앞에서 한없이 당당하면서도 스스로가 모자라다고 느끼는 존재들이라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그건, 아직도 변하지않고 있다는 거구요.
<공지>
1. 24시 연중무휴 행운분식 이야기는 브런치북과 브런치매거진 이렇게 둘로 나누어 연재됩니다. 그 곳에서 더 많은 에피소드를 볼 수 있어요. 언제나 시간을 내어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