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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주 Jan 03. 2020

이사가 이렇게 힘들었나

아파트 베란다 창문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바로 사다리차가 지층과 고층 사이를 쉼 없이 오르락내리락하는 하는 장면이다. 가끔은 인부들이 급하게 실은 짐들이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부들부들 떨며 올라가곤 하는데 그것을 보고 있을 때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마냥 커피잔을 쥔 손에 힘이 꽉 들어간다. 그리고 나는 잦은 빈도로 앞동과 옆 동의 아파트에서 수없이 토해내고 수없이 먹어치우는 짐들을 볼 적마다 내가 하나둘 거쳐간 이사의 순간들을 떠올린다. 




내가 최초로 본가를 떠난 시기는 스무 살, 그러니까 바로 대학교를 입학한 직후였다. 인천 계산동에서 서울 화양동 사이를 오가는 등굣길은 왕복 네 시간을 차지할 정도로 은근히 먼 거리였다. 입학초부터 박터지는 수강신청에 보기 좋게 실패하여 주5파가 된 나는 결국 한 달에 이십팔만 원을 주고 하숙을 하기에 이르렀다. 


정말 코딱지만 한 방이라는 표현은 누가 만든 것일까. 그건 개떡 같은 나의 방에 맞는 찰떡같은 표현이었다. 겨우 두 평이나 되었으려나, 백팔십의 남자 세명이 누우면 꽉 찰 것 같은 좁고 깨끗하지 않은 방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나름 독립기념이라고 생각했는지 이사를 온 첫날, 아버지와 나는 누렇게 들뜬 장판을 반짝반짝하게 닦으려고 꽤나 노력했다. 청소를 마치고 아버지와 나는 나란히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앞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는 둥, 술은 많이 마시면 안 된다는 둥, 주말에는 꼭 집에 와야 한다는 둥 뭐 그런 시답잖은 주제들이었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대학교 선후배들과 술자리가 끝난 어느 날이었는데 남자 선배가 자신도 방향이 같다며 같이 가자고 했다. 선배와 나는 자연스럽게 길을 걸었다. 하지만 서로 관심은 일도 없던 탓에 오늘 술자리에서 누구랑 누가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갔는데 왠지 사귈 것 같네, 누구랑 누구는 참 잘 어울리네와 같은 가십거리만 십 분가량 나누고 굿바이를 외치며 쿨하게 헤어졌다. 술도 기분 좋게 마셨겠다,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방문을 열었다. 그런데 어두워야만 하는 그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고 아주 커다란 누군가가 나의 이불을 덮고 누워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나의 벌개진 얼굴만큼이나 아버지의 얼굴도 참 벌개있었다. (차이라면 나는 알코올로, 아버지는 분노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겠지.) 그 순간, 내 머릿속에는 집 앞에서 남자 선배와 꽤나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던 순간들이 빠르게 스쳐갔다. 들으셨어요? 그래, 들었다. 아버지는 그 날, 그자와 내가 아무런 케미도 오고 가지 않았다는 사실의 발언에도 불구하고 술과 남자는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는 잔소리를 밤이 새도록 연설하셨다. 



그 후, 대학교 시절부터 결혼 전까지 나는 참 많은 곳을 옮겨 다녔다. 하숙집, 기숙사, 그리고 각자의 색깔을 진하게 가지고 있는 원룸까지 대략 여섯 군데 정도였다. 그 모든 집들의 첫날에는 항상 가족들이 함께 있었다. 한 번은 어느 작은 원룸에 아버지, 큰언니, 작은언니가 모두 모여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에 가구를 옮기고, 걸레와 빗자루를 들고 다니며 청소를 해준 적이 있었다. 


특히 아버지는 막내가 살 집안의 이곳저곳을 살펴보며 스위치를 톡톡 치다가 에이, 썩을 놈들이라는 거친 말을 내뱉고 밖으로 나가곤 했다. 얼마 후, 다시 문을 열고 돌아오는 그의 손에는 빨간 면장갑이 끼워져 있었다. 손에는 커다란 드릴이 들린 채로. 이러한 가족들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나는 어디 하나 고장 난 곳이 없는 정상적인 집에서 문제없이 잘만 살아았다. 그래서 이사라는 게 힘든 건지도 몰랐다. 누군가 대가 없이 옮겨주고 치워주는 게 우리의 사이에서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으니. 


그러던 내가 ‘이사’라는 단어만 생각해도 심한 두통을 느꼈던 건 몇 년 전이었다. 이 시기에 큰언니는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아 길렀으며, 작은언니는 해외에 나가 있었던 탓에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나는 처음으로 이삿짐센터를 불러야만 했던 것이다. 그래, 솔직히 처음에는 그까짓 것이 뭐 어려워,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건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 많던 길가의 종이박스는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살 때는 보이지 않았던 이 짐들이 대체 어디에서 이렇게 줄줄이 소시지처럼 나오는 것일까, 이삿짐센터는 왜 이렇게 비싼 것일까, 손 없는 날은 왜 더 비싼 걸까?, 짐은 언제 풀고 청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 다른 하나가, 그 하나를 해결하면 또 거대한 하나가 나오니 이게 몰래카메라요, 벌칙이 아닌가 하며 형체가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헛되게 의심하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 와중에 다행이었던 건 그 지쳤던 날, 너저분한 집 한가운데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 나를 누군가 익숙한 음성으로 불렀던 일이다.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손에는 면장갑이 끼워져 있었고, 익숙한 드릴을 들은 채였다. 난 그게 토르의 망치처럼 보였다. 


이제는 결혼을 하고 형편이 조금 나아져 완전포장이사를 한다. 돈이 꽤 많이 나가지만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 역시 전문가분들이라 가구들도 번쩍번쩍 잘 옮겨주시고, 그릇도 하나하나 신발도 하나하나 정리도 잘해주시니 우리가 할 일이 없다. 큰언니도 작은언니도 이제는 오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새 보금자리로 옮기는 첫날, 아버지는 어김없이 또 나를 찾아왔다. 인천에서 용인까지 오기 위해 아침부터 차에 시동을 걸었다고 했다. 그리고는 우리 부부의 이사가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줄곧 그 자리를 지켜주곤 아무 말 없이 집으로 돌아가셨다. 이제는 오래된 빌라가 아닌 괜찮은 아파트인 덕분에 더 이상 그의 드릴이 필요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 날 저녁, 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인천에 잘 도착했다는 말씀을 하시기 위해 전화번호를 눌렀다고 했다. 그리고 또 뭐라고 했더라. 아, 이 말도 했다. 용인이 너무 멀다고. 우리 딸이 너무나도 멀어졌다고. 그래서 조금은 속이 상한다고. 하지만 막내의 집이 참 좋더라고. 그러니까 그곳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둘이서 싸우지 말고 잘 살으라고. 




가족이란 존재는 참 신기하다. 한 곳에서만 다섯 명이 이십 년을 부대끼며 살다가 누구는 결혼을 해서 나가고 누구는 해외를 간다며 나가고 또 누구는 배워야 한다고 나간다. 그래도 우리는 서로를 모른 척하지 않는다. 각자가 첫 시작을 할 때마다 새둥지를 방문하며 이것저것 살펴주었으니까. 마치 배웅을 하듯…. 부모의 마음으로, 형제의 마음으로 말이다.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그 안에는 앞으로 잘 살아라, 라는 뜻이 담겨있을 테다. 


난 천상 막내로 태어나 그게 참 당연한 줄 알았다. 누군가가 시간을 내어 차를 끌고 오고, 그곳에 당신의 것이 아닌 나의 짐을 싣고, 내가 살아갈 그 조그마한 공간을 위해 기꺼이 빗자루와 걸레를 들어주는 행위에 대해서. 


알고 보니 그건 전화찬스 같은 거였다는 걸 나는 몰랐다. 그리고 무한리필인 줄 알았던 것들이 횟수가 제한된 그러니까 엄연히 유효기한이 있는 찬스라는 걸 깨달은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니 나는 살아온 시간 동안 스스로가 받은 배려와 선심에 대해 기꺼이 갚아나가야 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할 테다. 그게 참 쉽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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