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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자버 Feb 14. 2022

요리는 질색이던 내가 당근라페 만들기에 중독된 이유

갈월동 반달집 비혼 동거 기록

어쩌면 이 모든 ‘사태’는 빨간 채칼에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직장 상사가 베트남에 놀러갔다가 충동적으로 샀는데 본인은 사용할 일이 없다며 나에게 건네준 채칼 하나. ‘나도 요리 안하는데…’ 생각만 하고 회사까지 채칼을 챙겨다준 상사의 성의가 감사해 덥썩 받아왔더랬다. 그럼 뭐하나? 나란 인간은 평생토록 전자레인지에 냉동 도시락 돌려먹는 게 (요리라고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요리의 전부인 요.알.못인데. 그래서 반년이 넘도록 그 채칼을 서랍장에 넣어놓고 모셔만두던 차였다. 그러다 정말 문득, 아무 맥락없이, 그 채칼이 정말 야채 하나라도 썰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짜임이 헐거운 것은 물론 얇은 쇠 부분은 빛이 다 바래서 쉽게 부서질 것 같은 그 채칼의 쓰임새를 실험해 보고 싶었다.


당근 4개를 깨끗이 씻어서 보울에 담아두고 드디어 채칼을 꺼냈다. ‘이게 설마 되겠어?’ 의심은 잠시, 가벼운 손목 스냅과 함께 채칼을 타고 얇게 썰린 당근 줄기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스케이트를 타고 매끄러운 빙판을 달릴 때와 버금가는 쾌감. 쓱싹쓱싹 리듬에 맞춰 쓰댕 다라이는 금세 주황 더미로 가득 찼다. ‘어라? 나 이런 거 잘하는 사람 아닌데.’ 요리하는 내내 걸림돌이라곤 나 자신에 대한 선입견뿐. 찬장을 뒤져보니 오일, 식초, 후추, 겨자, 레몬즙 등 소스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가 이미 모두 구비되어 있었다. 채칼을 모셔만두고 있네, 하는 생각 하나로 시작된 당근라페 만들기는 그렇게 내 마음에 ‘요리 바람’을 잔뜩 불어넣는 사태를 일으키고 말았다.



당근라페는 채 썬 당근을 오일과 식초에 절여 피클처럼 꺼내먹는 음식이다. 고로 당근을 채써는 과정 빼고 딱히 조리의 과정이랄 것 없이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 난 채칼 앞에서 당근이 별다른 저항 없이 주황색 줄기가 되어 차곡차곡 쌓이는 모습이 좋았다. 당근을 절일 소스에 오일을 많이 넣으면 오일 맛이 많이 나고, 식초를 많이 넣으면 신맛이 많이 나는 과학적인 정직함도 좋았다. 냉장고에 잔뜩 쟁여두고 꺼내먹을 때마다 조금씩 익어가는 시간의 변화를 입으로 느끼는 과정도 좋았다. 냉동 도시락을 전자레인지에 돌려먹는 것이 요리(라고 할 수 있다면)의 전부였던 내 삶에 이게 웬 혁명과도 같은 변화람?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요리를 멈출 수가 없었다.


이번엔 이사 오면서 수납장에 처박아두기만 한 나베 냄비를 꺼냈다. 이참에 부루스타는 새로 샀다. 배추와 소고기를 겹겹이 쌓은 다음 숭덩숭덩 크게 썰어냈다. 멸치와 다시다로 국물을 내고 좋아하는 표고버섯은 레시피보다 두세 개 더 준비했다. 국물 간을 맞추겠다며 국간장과 진간장을 구분해 한 스푼, 두 스푼 계랑 해 넣고 있는 내 모습이 어색했다. ‘난 짜지 않아서 좋은데 누군 밍밍하다고 욕하겠군.’ 거실 테이블에 부루스타를 올려놓고 나베를 개시했다. ‘불은 제멋대로여서 위험해, 방심하지 말자.’ 그런데 생각보다 너그러운 속도로 배추와 고기를 익혀주는 부루스타. 시시각각 변하는 배추와 고기 식감에 코스 요리를 먹는 것 같은 만족감. 따뜻한 국물에 눈물이 살짝 고일 정도로 뺨이 붉게 상기되는 걸 느끼며 든든한 한 끼를 마무리했다.


그렇게 당근라페는 내가 먹는 요리 어디에도 빠지지 않는 주식이 되었다. 샌드위치에 넣어먹고 계란말이와 곁들여 먹고 매운 소스를 곁들여 김치처럼 먹기도 했다. 여러번 만들다보니 나만의 소스 비율도 생겼다. 나의 이런 변화를 나 자신 보다 놀라워하고 신기해한 사람은 바로 곁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본 남자친구였다. 내가 해준 요리를 가만히 받아 먹을 때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의아해하면서도 기뻐하는 것 같았다. 내가 먹는 음식이 어떤 재료를 사용해서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지는지 다 알고 있으니까 한입 한입 먹을 때마다의 맛의 감각이 다른 것 같다고 내가 말하자, 남자친구는 요리의 기쁨을 나와 함께 공감할 수 있는 날이 온 게 믿기지 않는다며 눈물겨워했다. 아기새처럼 남자친구가 해주는 음식만 받아먹던 내가 갑자기 척척 요리를 해서 내놓으니 얼마나 신통방통 했을까?


요리 하나를 정복할 때마다 가상의 누군가가 쿠폰에 도장을 찍어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뿌듯함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 쿠폰을 다 채워서 내가 보상으로 받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얇게 조각나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당근과 함께 묻어버리고 싶었던 건 무엇이었을까? 더하면 더하는 대로 덜하면 덜한 대로 내 손으로 컨트롤하고 싶었던 건 달고 짠 맛뿐이었을까? 아니면 자꾸만 혼란해지는 마음이었을까? 그렇게 요리에 잔뜩 홀린 1월이 무사히 지나가고 있었다. 브로콜리 샌드위치를 해먹은 날과 두유 리조또를 해먹은 날, 그리고 배추 감자 파스타를 해먹은 날 사이, 그 어디쯤 위치한 아빠의 1주기도 무사히 지나갔다. 그날의 헛헛함을 과메기 쌈에 마늘이랑 같이 쌈 싸 먹었는지 불고기 볶음이랑 같이 볶아먹었는지 잘 기억도 안 난다.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 불길한 연락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시간이 시간대로 지나가 버렸다는 허망함. 너무 사랑하는 아빠와 제대로 된 작별 인사도 없이 헤어져서 그런가, 내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것들 사이에서 나는 단단한 당근과 채칼을 쥐어버리자고 마음먹은 건 아닐까. 그래도 세상의 어떤 요소들은, 아주 작고 하찮은 정도라도 내 손 안에 꼭 쥐어진 채 내가 원하는 대로 쥐락펴락이 된다고, 내 입맛에 맞춰 달달 볶아진다고, 내게 있는 미약한 통제감을 맛있게 씹고 뜯고 맛보면서 자꾸만 불안해지는 마음을 달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에이, 이런저런 가설만 늘어놔봤자 다! 살기 위해 마음이 작동하는 원리는 너무 복잡해서 가끔은 그 앞뒤를 알 수가 없으니까.


어쨌든 그런 과정으로 2월의 나는 튼튼하게 생존해있다. 요리 쿠폰에 도장을 꽉 채워 얻게 된 건 다름 아닌 1.5킬로 그람의 살이라는 사실이 그저 암담할 뿐. 이번 달엔 운동을 하며 나 자신을 컨트롤해볼까? 왜 운동에는 마음이 하나도 동하지 않는 걸까? 그래, 1월을 무사히 지나 보내기 위해 요리를 했다는 건 다 구차한 변명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요리해 먹고 싶은 마음에 구차하게 다른 이유를 덧씌우지 말자. 많이 먹으면 먹는 대로 살이 찌는 몸처럼, 식초를 많이 넣으면 새콤해지는 당근라페처럼 정직하고 단순하게 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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