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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자버 Feb 17. 2022

4년 경력 버리고 신입으로. 이직 말고 빠직 했습니다.

갈월동 반달집 동거 기록 - 프롤로그 #6


100년 된 적산가옥에서 남자친구 '설쌤'과의 동거 생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나자마자 잘못된 만남이라는 것을 직감하는 순간이 있다. 2020년 초여름, 우연히 신입 카피라이터 모집 공고를 발견한 순간이 딱 그랬다. 취업이 급한 20대 중반도 아니고 스물 아홉이 다 된, 그리고 회사에서 한창 물 오른 5년차 PD로 일하고 있을 때, 게다가 300만원 짜리 포상휴가를 앞둔 시점에! 저 공고가 내 앞에 나타나고 만 거다. 이게 무슨 타이밍의 장난이람? 하지만 더욱더 야속한 건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취업과 함께 애당초 사라진 줄 알았던 카피라이터에 대한 막연한 욕망이 내 마음 한 쪽에  버젓이 살아있을 줄은 몰랐다. 불쑥 튀어나온 그 욕망은 내 마음 전체에 화르륵 불을 지피고 말았다.


‘떨어지면 어때? 그래봤자 월 몇백씩 받는 직장인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잖아.’ 무대뽀 마인드로 자소서를 쓰기 시작했다. 아쉬울 게 없으면 글은 제멋대로 신나게 쭉쭉 뽑혀 나온다. 취준생때 이런 자신감으로 자소서를 썼더라면, 쩝. 이렇게까지 꾸밈없이 오직 ‘자기소개’에 충실한 자기소개서를 써본 적이 있었나? 있는 그대로의 나를 소개하는 것 외엔 아무런 목적 없는 말 그대로의 자기소개서 말이다. 판에 박힌 일상을 붕어빵처럼 살아내는 단물 빠진 회사원이 간만에 자기 매력을 어필하는 글을 쓰자니 설레고 신선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자소서가 완성됐다.


어느날 악마가 제 앞에 툭 하고 튀어나와 난데없이 묻습니다. “넌 무엇이냐?” 당황스런 맘에 저는 “서울 사는 아무갭니다.”하고 대답해버릴 뻔 하지만 그럼 제 본새가 영 멋들어지지 않을 것 같아 망설여집니다. 마치, 우산을 처음 보는 아이에게 우산을 쥐어주며 “그건 우산이란다.”하는 한 마디만 해주고 비 오는 바깥으로 내모는 것 만큼 무책임한 대답이니까요.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저는 늘 생각해오던 한 문장을 내뱉습니다. “좋아하는 일을 좇다보면 반드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러다 종종 좋은 일도 일어난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살기로 했다는 다짐이 아니라 살다보니 자연히 머리에 스민 깨달음 입니다. 선물같은 ‘좋은 일’들이 어떻게 나에게 찾아 왔을까 고민하고 보니 그 일이 일어나도록 돕거나 영향을 준 ‘좋은 사람’들이 제 곁에 있었고 그런 좋은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게 됐었지 하고 돌이켜 보니, ‘좋아하는 것’을 찾아 발을 내딛은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좋은 인연이 되었던 겁니다. 이정도 대답이면 악마의 마음에 쏙 들진 않아도 당장 지옥으로 내쳐질 정도도 아닐 것 같습니다. 저라는 사람이 작동하는 원리와 방향에 대해선 설명 했으니까요.(중략)

악마까지 소환해가며 좋은 사람들을 만나 좋은 일을 도모하는 것의 중요함을 말한 이유는, 회사에서 사람을 구하는 일도 작은 단위로 보면, 결국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자기소개를 통해 저는 또 좋아하는 것을 향한 한 발자국을 내딛었습니다. 미지수이긴 하지만 이 길 어디에선가 좋은 인연을 만날 수 있길 고대하면서요.  보여드릴 수 있는 게 지금까지의 손자취 뿐이라 포트폴리오로 정리해 첨부드립니다. 그 손자취들이 만남으로의 지름길이 될 수 있을지 확인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파우스트도 아니고 악마 운운하는 글을 쓰다니 너무 제멋대로였나? 설마 저게 합격하겠어? 라는 생각도 아주 잠깐, 서류 전형에 덜컥 합격하고 말았다. 그래도 취업 준비 공부 안 한 지가 얼만데, 설마 필기에 합격하겠어? 라는 생각과 달리, 필기 전형에도 덜컥. 나이가 많아서 되겠어? 라고 생각했지만, 실무 면접에도 덜컥. “저도 점쟁이가 어떤 직업이 어울릴지 속 시원히 말해줬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뻘소리를 한 최종면접에도 덜컥. 덜컥, 덜컥, 덜컥 최종 합격까지 하고 말았다. 골때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미친 사람이 4년 경력을 포기하고 신입사원이 된단 말인가? 그런데 또 달리 생각해보면,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좋아서 한 일이 좋은 인연으로, 좋은 인연이 결국 좋은 일로 연결된다는 내 믿음을 스스로 증명해낸 것이기도 했다. 내 손으로 쓴 자기소개서 내용 그대로 말이다. 어쩌면 4년 동안 회사를 다니며 느낀 성취감보다 더 큰 무언가가 다가와 머리를 세게 치고 갔다. 제법 큰 타격감에 마음이 동하고 말았다. 스스로를 제법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사는 편이지만 마음이 동했을 때 머리로 하는 계산은 맥을 못 춘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포상 휴가를 떠나지 못했다. 신입사원 공고를 보자마자 뇌를 거칠 것도 없이 세포부터 느꼈던 전율을 부정할 수 없었다. 오직 솔직하기만 했던 진정성 100%의 자소서와 누구에게 잘 보이려는 의도 없이 내가 좋아서 쓴 글로 엮은 포트폴리오로 합격한 회사라면, 궁극적으로 인생에서 이루고 싶은 것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데 분명히 도움이 될 거라는 ‘열린 믿음’ 하나로 큰 결정을 하고 말았다. 당장 몇 년은 힘들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옳은 선택이었음을 확신하게 될 거고, 그런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나가겠다는 다짐과 함께. 그 당시 수강하던 에세이 수업의 선생님이 “경력이 빠그라졌으니 이직이 아니라 빠직”이라며 붙여주신 절적한 명칭과 함께.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난의 하루하루였다. 당연히 예상하던 일이라 당황만 하지 않았을 뿐. 당연하게도 힘듦은 나를 고스란히 힘들게 했다. '아, 이런 게 바로 신입사원이었지!' 하는 반갑지 않은 익숙한 그 느낌과 재회하며 매일을 뚝딱거려 나갔다. 거기에 더해, 왜 좋은 직장 버리고 왔냐며 한 마디씩 거드는 낯선 사람들의 오지랖에 스트레스가 차곡차곡 쌓였다. 주절주절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다니기보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철벽을 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 스스로를 고립시켰다. ‘당신의 이해를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저의 길을 걸어 나갑니다.’라는 마음속 줏대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우리집은 상수. 회사는 신사."

시옷과 시옷, 초성만 같았지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강 하나가 괴리감을 증폭시켰다. 아침마다 강 건너 일하러 가는 게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아예 딴 세상으로 팔려나가는 것 같달까. 4년 경력을 빠그라트리고 갑자기 신입이 되는 기분이란 KTX를 타고 가다가 따릉이를 타는 기분과 같았다. 간만에 느끼는 나의 무능력함에 전신이 도취되어 회사 일이 그렇게 바쁘지 않은데도 집에 돌아오면 몸은 늘 녹초가 되어있었다. 얼른 새로운 회사에 적응해서 잘하고 싶은데, 스스로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갈고 닦는 길고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일해본 짬이 있기에 더 잘 알았다.


마음 둘 곳이 필요했다. 내가 누구이고 어떤 꿈을 갖고 있으며 무얼 잘하는 사람인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곳. 편히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곳. 어떤 수모를 겪고 와도 질문 일절 없이 무조건 나를 품어줄 수 있는 곳.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그곳에서 나와 내 갈 길을 향해 다시 또 발걸음을 옮길 힘을 얻을 수 있는 곳. 언니와 신경전이 벌어지는 지금의 집이 그런 곳일까? 글쎄,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지금보다는 더 보금자리 역할을 잘해주면서도 나를 더 채찍질 할 수 있는 아지트 같은 곳. 그런 곳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자 퍼즐 조각들이 착착착 자리를 찾아 큰 그림을 완성하는 것처럼 머리속에서 생각들이 짜맞춰지기 시작했다. 나와 같이 살아볼 생각이 있다고 말했던 설쌤의 의견과 두 번의 연애디톡스를 거쳐 주는 것으로 만족스러운 홀로서기 연애의 시작, 거기에 이젠 새로운 보금자리의 필요까지. 살아보기 좋은 집만 구한다면 설쌤과 함께 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단지 상상만으로도 묵직한 4년 경력직 신입사원의 노곤함이 싹 가시는 것 같았다. 그간의 길고 긴 밀당이라면 밀당을 끝내고 이젠 내가 먼저 설쌤에게 말하고 싶었다. "나랑 같이 살아볼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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