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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자버 Feb 24. 2022

택배 도난 사건의 전말: 범죄만 있고 범인은 없다

갈월동 반달집 동거 기록 #18


91살의 집주인 할머니가 계신 100년 된 적산가옥에서 남자친구 '설쌤'과의 동거 생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의 별칭은 반달집입니다.


함께 사는 동거인이 프리랜서인 덕분에 직장인인 나는 제법 많은 혜택을 누리며 산다. 택배 걱정이 없다는 것도 그 혜택 중 하나인데, 근무 중에 도착한 택배도 바로 받아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나에겐 든든한 빽이다. 대문을 들락날락하며 택배를 나를 동거인에게는 미안하지만 나 또한 직장인이기에 해줄 수 있는 잡다한 도움을 주고 있겠거니 생각하며 미안함을 상쇄시킨다. 그런데 그날만큼은 내가 너무 이기적이고 안일했다는 것을 인정한다. 출근길, 대문을 나서며 새벽 배송된 택배 박스를 두 눈으로 똑똑히 봤음에도 불구하고 ‘이따 동거인에게 부탁해야지’하는 생각과 함께 흐린 눈을 하고선 그냥 갈 길을 가버린 그날 말이다…


“자버야 택배는 없고 아이스팩 두 개만 굴러다니고 있어…”


그날 오후, 동거인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보고 마음이 철렁했다. 일단 살면서 처음으로 택배를 도둑맞았다는 사실이 충격이었고, 내가 아침에 택배를 보자마자 대문 안으로 들여다 놓기만 했어도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란 후회가 뒷통수를 때렸다. 난 차마 동거인에게 아침에 택배를 봤었다는 사실은 털어놓지 못하고, 택배사에서 보낸 사진을 보면 택배를 도난당한 것이 분명하다며 분노했다. 택배에 들어 있는 내용물은 냉동 도시락이었는데, 도둑이 상자를 뜯어서 어차피 쓰레기가 될 아이스팩은 버리고 의도적으로 냉동 도시락만 홀랑 가져가 버렸다는 게 얄밉고 분했다.



’피해 본 금액은 총 이만사천 원인데… 이걸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이만사천 원. 크다면 크고 적다면 적은 돈이었다. 하지만 피해 금액보다 내 도시락으로 배를 채운 택배 도둑이 같은 동네에서 뻔뻔하게 살아 숨 쉬고 있을 생각을 하니 열이 뻗쳐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냅다 국민신문고를 켜서 사건을 시간 별로 상세히 서술하고 현장 사진까지 첨부한 다음 접수 버튼을 눌렀다. 보상을 받진 못해도 이 사건의 전말이라도 알아야겠다는 심정이었다. ‘도둑놈아 잡히기만 해봐라. 내가 그 뻔뻔한 얼굴을 아주 제대로 확인해주겠어!’


며칠 뒤 용산서에서 진술서를 쓰러 방문하라는 연락이 왔다. 택배 도둑을 잡겠다는 의지로 불타오른 나머지 귀찮은 줄도 모른 채, 토요일 아침 8시부터 집을 나섰다. 무언가를 진술하러 경찰서를 방문한 건 처음이었다. 내가 뭘 잘못해서 간 것도 아닌데 쫄렸다. 강력반 위치가 헷갈려 지나가던 형사님께 길을 물을 때에도 ‘나 죄지어서 여기 온 거 아니에요.’를 심하게 어필하며 굉장히 정갈하고 착한 어투로 말을 건넸다. 아마 나 말고 대부분의 사람이 그런 마음이겠지? 그리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게 될진 몰라도 죄지어서 이곳을 다시 올 일은 만들지 말자고 다짐했다.


“범인은~ 배고픈 자~ 이겠지요~”


내 사건을 담당하신 형사님께서는 안 봐도 뻔하다는 듯 얘기하셨다. TV에서 보던 험악한 수사반장과는 거리가 먼, 회사에 흔한 과장님처럼 열심과 무관심, 친절과 오지랖 그 어디쯤의 태도를 지닌 평범한 분이셨다. 이른 아침부터 책상엔 얼음이 채 녹지 않은 카페라테가 놓여있는 걸 보니 밤새 숙직이라도 하신 모양이었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사건일 텐데 정해진 절차대로 진술서를 작성해주시는 형사님의 성의 있는 태도에 생채기 난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그래도 범인을 찾고 싶은 맘은 굴뚝같았다. 아마 근처 노숙자가 범인일 거라 거듭 강조하는 형사님의 추측에 난 그저 “모르는 일이죠~”라 답했다.


역시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긴 했던 걸까? 경찰서를 방문한 지 20일이 다 되어가는 동안, 기다리는 사건 정황은 나오지 않고 애꿎게 담당 형사만 세 차례나 바뀌었다. 속사정은 모르지만, 담당 형사가 바뀌었다는 문자를 받을 때마다 귀찮은 일을 서로에게 토스하는 평범한 직장인의 얼굴을 한 형사님들의 모습이 점점 더 생생해졌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기다린 끝에 정황을 확인했다는 형사님의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CCTV가 알려준 ‘진실’은 그야말로 황당함 그 자체였다.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1. 이른 아침 본인은 택배를 확인하고도 대문 밖에 방치하고 나옴

2. 갑자기 바람이 불어 택배 박스가 쓰러지면서 내용물(냉동 도시락)이 밖으로 쏟아짐

3. 지나가던 폐지 줍는 할머니가 박스를 주워가심

4.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대문 앞에 널브러져 있는 냉동 도시락을 주워감

5. 그렇게 대문 앞에는 아이스팩만 덩그러니 남게 됨


그렇다면 도둑은 누구라고 할 수 있을까? 4번 아주머니를 도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마 죄를 물으면 본인은 버려져 있는 도시락을 주워갔을 뿐이라고 변명할 터였다. 폐지 줍는 할머니도 버려진 박스인 줄 알았다고 할 터였고. 그렇다면 바람이 잘못했나? 아니면 물러터진 박스에 도시락을 포장해준 쇼핑몰이 잘못했나? 그것도 아니라면… 역시 제때 택배를 대문 안에 넣어놓지 않은 나의 잘못인가? 머리가 너무 복잡했다. 그 누구 하나를 범인이라 꼬집어 말할 순 없고 택배를 도난당했다는 사실만 아이스팩처럼 덩그러니 놓여 휘 휘 굴러다닐 뿐이었다.


CCTV를 더 추적해 도시락을 가져간 아주머니의 행방을 알아보겠다는 형사님의 말에 알겠다고는 했지만 나 스스로는 사건을 종결해버렸다. 바람, 쇼핑몰, 폐지 할머니, 도시락 주워간 아주머니, 그리고 나까지 해서 각각 4,800원 치 범죄를 저지른 거로 생각하기로 했다. 잘잘못을 가리는 일이란 이다지도 복잡하다. 하나의 원인이 하나의 결과를 만드는 이상적인 세상은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알게 모르게 얼기설기 얽혀있을 세상만사의 감춰진 수면 아래를 우연히 목격하고 만 것 같아 멀미가 날 만큼 어지럽고 마음이 어수선해졌다.


도시락 택배 도난 사건 이후로 나는 미묘하게 태도가 좀 더 모호해진 사람이 되고 말았다. 함부로 뭔갈 추측하고 가정하고 짐작하는 일이 한층 더 무서워졌다. 그리고 반대로, 그런 식으로 나를 판단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한층 더 혐오하게 되겠지. 그렇다면 난 꼰대에 더 가까워졌다고 해야 하는 걸까, 더 멀어졌다고 해야 하는 걸까?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이제 나는 택배를 보자마자 대문 안으로 들여놓는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복잡한 인과관계를 꿰뚫는 현안은 없을지언정, 일을 덜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원인 하나를 제거하는 일. 그것이 내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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