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월동 반달집 동거 기록 #22
91살의 집주인 할머니가 계신 100년 된 적산가옥에서 남자친구 '설쌤'과의 동거 생활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희 집의 별칭은 반달집입니다.
“자버야, 나 자가진단 키트 양성 떴어.”
출근길에 남자친구로부터 청천벽력같은 메시지를 받았다. 전날 밤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다며 빌빌대던 설쌤에게서 왜 코로나의 그림자를 엿보지 못했을까. 20만 명, 30만 명 확진자 수가 아무리 치솟아도 그건 대문 밖 남 이야기인 줄만 알았는데, 오산이었다. 아니, 오만함이었나? 난데없이 밀접접촉이라는 단어로 한방에 정리된 설쌤과의 지난 며칠간을 되짚어봤다. 잴 것도 없이 설쌤이 확진이면 나도 확진이었다. 이 절망적인 소식을 회사에도 공유한 뒤 발걸음을 돌려 다시 집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설쌤은 하루 뒤 확진을 통보받았고, 이제 나의 순서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은 멀쩡한 몸을 이끌고 PCR 검사를 하러 가는데 마음이 잔뜩 졸아들었다. 확진자가 많아지면서 PCR 검사 대상 기준이 깐깐해졌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거인이 확진돼서요. 동거인이 확진을 받아서요. 동거인이 확진자입니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이리저리 시뮬레이션을 돌려보는 와중, 우리가 진짜 동거인이라는 걸 증명하라고 하면 어떡하나 하는 약간의 걱정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처음이었다. 입 밖으로 남자친구인 설쌤을 ‘동거인’이라 불러보는 일은.
“동거인이 확진자여서요.”
설쌤의 확진 통보 문자를 검사관에게 보여주며 말했더니 별다른 확인 절차 없이 검사 대기 줄에 들어갈 수 있었다. 대외적으로 설쌤이 동거인으로서 기능한 첫 번째 케이스가 코로나 검사라니!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지도 않았다. 묘했다. 남도 아니오, 가족도 아니오, 동거인이라는 호칭으로 딱 떨어지는 관계. 그 뒤에 ‘왜요?’라던가 ‘결혼한 건 아니구요?’라던가 사족 같은 질문 없이 깔끔한 마무리. 딱 맞는 이름을 가진 자만 누릴 수 있는 만족감이 바로 이런 것일까? 그 뿌듯함은 코를 찌르는 칼칼한 고통과 함께 금방 휘발되고 말았지만 말이다.
검사를 받고 집에 돌아와 앓아 누운 설쌤을 극진히 간호했다. 생각보다 컨디션이 괜찮았던 나는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이 반짝였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머리를 맡대고 잠든 사이였지만 그럼에도 나는 아직 청정한 상태일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공간 격리를 철저하게 했다. 설쌤에게 음식과 약품을 건네줄 때도 마스크와 비닐장갑을 끼고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내가 전할 수 있는 건 영양 배합 완벽한 식사와 비타민 듬뿍 든 간식 뿐. 설쌤의 병든 식욕이 내 의욕을 따라오지 못한 게 아쉬울 정도로 풍족한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리고 그날 자정, 그 밀접한 접촉에도 불구하고 코로나가 나 만큼은 피해가지 않았을까하는 희망이 처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려도 입에선 얼음을 토해낼 것 같은 냉기가 차올랐다. 아무리 자세를 바꿔도 근육통 때문에 누운 자리가 편치 않았다. 끓는 열 때문에 바싹 마른 입에서는 병든 사람 특유의 쉰내가 올라오고 있었다. 그렇게 꼴딱 하룻밤을 앓으며 지샜다. 누워있다기 보다는 세상의 제일 구석진 곳에 쳐박혀 고여있는 느낌으로다가 눈만 끔뻑이고 있는데 나의 확진을 알리는 문자가 도착했다. 네, 저도 잘 알아요. 알다마다요.
그렇게 이틀이 어떻게 갔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레코딩 버튼을 누르지 않은 채 플레이만 반복한 캠코더처럼 순간순간을 흘려보내기만 했을 뿐. 열이 내리고 두통이 가시자 정신은 차렸지만 금세 목이 끔찍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목에 칼을 꽂는 통증 덕에 알람 없이도 새벽에 벌떡벌떡 일어날 수 있었다. 회사 인사팀에서 몸은 괜찮냐고 연락이 왔을 때도 인사치레 같은 말 생략하고 “아니오.” 하는 대답이 바로 나왔다. 아니,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입만 벙긋벙긋 움직였다. 동시에 눈물 두 줄기가 볼을 타고 흘렀다. 코로나가 이렇게 서럽다.
개인적으로 코로나의 심각성을 깨달은 건 슈퍼 식욕을 자랑하는 내가 입맛이 없어 끼니를 거른 때였다. 우울할 때도 초콜릿을 입에 넣으며 슬퍼하는 내가 식욕을 잃다니. 이보다 심각한 증상이 또 있을까? 설쌤에게 찾아온 비극은 후각의 상실이었다. 라면을 먹어도 통각으로 느껴지는 아픈 자극만 있을 뿐 아무 맛이 나지 않는다면서 설쌤은 아무 재료나 섞은 괴식으로 끼니를 떼우기 시작했다. 우유에 오트밀을 말아 아가베 시럽을 쳐서 먹는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고통이 피크를 치고 하락세를 보이자, 코로나가 가져다준 이상한 일상을 조금씩 웃어넘길 수 있게 됐다. 100년의 시간을 버텨온 적산가옥이지만 역병 바이러스가 집 안까지 침투한 건 처음 아닐까? 그 바이러스의 매개체로서 영광이라고 해야하나 수치라고 해야하나…
그렇게 적산가옥과 설쌤과 코로나 바이러스와 함께 지낸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신기하게도 격리 해제를 이틀 앞두고 몸이 점점 멀쩡해지기 시작했다. 끝물의 코로나바이러스란 화끈하게 아프고 확 끝나게 프로그래밍 되어있는 것일까. 성격은 내향적이지만 워낙 밖을 나다니길 좋아하는 나로써 이렇게 풀로 집에서만 보내는 건 고역이었다. 남자친구와 밥상도 침대도 변기까지도 나눠 쓸 생각으로 시작한 동거지만 이렇게 사이좋게 역병 바이러스까지 나누게 될 줄이야. 먼 훗날, 함께 아팠던 이때를 떠올릴 땐 훈훈한 미소를 지을 수 있을까? 음, 아직까진 목 아래쯤이 쓰라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