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판을 달길 잘했네요

우리 카페만의 메뉴 이야기

by 이명선

첫 메뉴 라인업은 우리가 커피를 배웠던 카페를 기준으로 인기 카페들의 메뉴를 참고해서 정했다. 내가 즐겨 먹는 커피 외에는 어떤 것이 카페에서 잘 팔리는 지를 잘 몰랐기 때문이다.

에스프레소 메뉴를 예로 든다면 아메리카노를 센터로 두고 카페라떼, 카푸치노는 거의 붙박이 멤버이고 바닐 라라떼, 카페모카도 잘 나간다. 캐러멜마끼아또는 고민 끝에 너그럽게 끼워 주었다. 마끼아또는 라떼와 똑같이 우유 거품으로 만들지만 거품 특성상 만들기가 살짝 귀찮다. '라떼 거품과 카푸치노 거품의 중간 어딘가의 거품'이라고 사부님이 말하기도 했다. 게다가 카푸치노와 캐러멜마끼아또는 차갑게 만들 때 거품기에 우유를 넣고 손으로 펌핑해서 거품을 정성 들여 내야 한다.

(흔히 발음하는 '캬라멜'의 바른 한글 표기는 '캐러멜'이다.)

나중에 보니 카푸치노는 아이스 메뉴로 제공하지 않는다 거나, 캐러멜마끼아또보다 만들기 쉬운 캐러멜라떼로 대신해서 효율성을 높이는 카페도 있었다.

내가 오래 가진 생각들이라 해도 과연 일반적인 것인지 확인해야 한다. 나는 카페에서 허브티를 사 먹은 적이 거의 없어서 허브티 메뉴를 구성할 때 이게 팔리긴 할까 걱정했다. 허브티는 집에서 티백이나 마른 찻잎을 우려서 만들기가 참 쉬운데 굳이 아메리카노보다 비싼 돈을 주고 밖에서 사 먹나 하는 편견이 있었다.

카페에는 카페인을 못 먹는 사람들도 오고 커피보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온다는 것을 카페를 하기 전엔 알지 못했다.




당시 유행하던 카페 인테리어 중에는 커다란 칠판을 벽에 고정하고 메뉴를 직접 쓰는 방식이 있었다. 친근하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내고 수정하기도 쉽다.

첫 메뉴판은 손글씨 강사인 지인에게 부탁해서 예쁘게 꾸몄다. 그 이후에 가격이나 메뉴 변경 등으로 수정 사항이 있을 때마다 부탁할 수가 없어서 아쉬운 대로 직접 썼다. 나는 글씨 쓰기를 좋아해서 칠판으로 된 메뉴판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수학 선생님들이 주로 쓰는 색색의 분필을 사서 큰 칠판에 쓰고 그리는 것도 재미있었다.


부분적으로 수정해서 글씨체가 제각각인 칠판 메뉴판


카페는 계절과 이벤트에 민감한 곳이다. 여름에는 팥빙수나 스무디 종류, 겨울에는 생강차나 쌍화차 같은 계절 메뉴를 만든다. 딸기 철에 딸기 음료, 크리스마스 무렵의 특별 메뉴들도 올라갔다 내려간다. 이렇게 수시로 바뀌는 메뉴를 바로바로 적용하기에는 칠판만큼 편리한 게 없었다.

사진에서처럼 가격을 4000원이 아닌 4.0으로 적은 것은 리디노미네이션 전략(화폐 액면 단위를 낮춰 적는 마케팅 전략)도 적용하고 칠판 공간도 여유롭게 쓰는 일석이조의 방법이었다.

소비자 심리학 연구 중에는 4000원을 4.0으로 적으면 소비자들의 계산 센스를 살짝 뒤틀어 '더 많이 지출하게 할 수 있다'는 결과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실제로 많은 카페들이 가격표를 그런 방식으로 적는다.

메뉴 가격을 정할 때 나름 고민을 하여 허브티는 3800원, 카야토스트는 2800원 등으로 했었는데 이것은 '800원 가격전략'이었다. 많은 마트, 상점에 유행하던 900원 가격전략에서 한 단계 들어간 것인데 심리적 가격 장벽을 낮춰준다는 9900원, 19900원 등의 숫자에 더 이상 소비자들이 흔들리지 않자 뒷자리를 800으로 내렸다고 한다.

어찌 보면,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고객과 눈치싸움 혹은 심리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카페의 주력 상품인 커피는 당연하고 돈을 주고 사 먹는 카페의 메뉴들은 일단 맛있어야 한다. 개인의 선호도 차이나 각자 다른 입맛에 대한 고민은 접어두자. 보통의 미각과 취향을 가진 사람이 맛있다고 느끼면 된다.

60대의 예민한 여성분(이 나이 때 여성분들은 단것을 좋아하지 않는 경향이 많다)이 '이 집 레몬차는 너무 달아'라고 말하면 '청을 너무 많이 넣어 드렸나 봐요. 뜨거운 물 더 드릴까요?' 정도로 응대한다. 그 한 마디에 '우리 집 레몬차가 너무 단가?'라는 걱정은 하지 않는다. 레몬차를 마신 고객 여러 명이 공통적으로 얘기하거나 내가 먹어봐도 현재의 레시피가 너무 달다면 그때 수정한다.

레몬차를 주문하는 고객에게 미리 '직접 만든 청으로 만들어서 기본적으로 단맛이 있습니다. 단맛은 조절이 가능합니다.'라는 안내를 한다. 레몬차가 너무 달다고 불평한 고객을 기억했다가 다음번에 그 점을 상기해서 응대하면 더욱 좋다.

고구마라떼로 예를 들어 보자. 고구마 분말에 감미료를 혼합한 파우더나 시판용 페이스트를 썼을 때와 고구마를 직접 쪄서 만들었을 때 완전히 다른 맛이 난다. 재료비는 좀 더 비싸지만 사실 찐 고구마 100%로 만든 맛있는 고구마라떼를 3500원에 팔아도 손해는 나지 않는다. 맛과 재료비 고민을 동시에 충족하는 파우더+페이스트 혹은 파우더+찐 고구마 등의 배합 레시피도 있다. 모두 내가 직접 만들어 먹어보고 최적의 재료를 찾아야 한다.

직접 만드는 재료는 손이 더 가고 시간이 들어서 고구마 찌기, 자몽청 담기 등은 동업자가, 그 밖의 재료 준비는 내가 하는 식으로 업무를 나눴다.

그리고 관리해야 할 재료는 최대한 적은 게 좋다. 팥빙수에 쓰는 단팥과 연유로는 통단팥쉐이크도 하고 연유라떼도 하는 식이다.

우리 카페는 겨울마다 생강차 3종이 인기가 많았는데 레몬생강차, 꿀생강차, 유자생강차였다. 같은 재료로 레몬차, 유자차, 레몬에이드, 유자에이드 등을 만들 수 있는 건 당연하다.


한 가지 메뉴만을 위해 존재하는 재료가 매장에 너무 많으면 점점 난감해진다.




카페 메뉴는 비슷비슷한 것 같지만 그 카페만의 시그니처가 있고 특별히 맛있는 메뉴가 있다.

우리 집만의 시그니처를 만들고 홍보하고 일부러라도 고객과 나 자신에게 자꾸 인식을 시켜야 한다.

우리 카페는 생자몽을 으깨어 담은 자몽청으로 만든 여러 자몽 음료들과, 레몬과 생강청을 적절히 섞은 레몬생강차가 시그니처였다.

우리가 카페를 그만둘 때, '이제 어디 가서 이런 커피를 마셔요' 하는 말만큼 많이 들은 게 '올 겨울엔 레몬생강차를 못 마시잖아요'였다.

올겨울엔 나도 그 레몬생강차가 그리워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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