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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Jul 26. 2023

그 밤의 교훈

삼단봉과 생존 가방

 며칠 전 밤의 일이다.   

 뭔가 타는 냄새가 나서 잠을 깼다. 담배를 피우는 냄새 아니면 전선 같은 게 타는 냄새였다. 공동주택 구조적인 문제로 이웃에서 스며드는 담배 냄새라면 기분만 나쁠 일이었겠지만 만에 하나 집안팎에서 뭔가가 잘못되고 있다면 심각하다.

 일어나서 냄새를 추적했다. 그런데 수상한 냄새는 방향이 잘 잡히지 않고 방문 밖에서 나다 말다 하더니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냄새는 더 안 났지만 정말 아무 일이 없나 확인하려고 거실등을 켜고 살폈다. 잘 자던 개가 부스스 일어나 무슨 일인가 하며 나를 따라다녔다.

 그 서슬에 남편도 깼다.


 결국 냄새의 발원지는 못 찾고 집 안팎에 특이사항은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누웠다.

 뭔가 맡아본 냄새 같으면서도 낯선 냄새가 너무 궁금했다.




 

 잠이 바로 올 리가 없다. 어둠 속에 누워서 공상을 펼쳤다.

  

 한밤중에 갑자기 비상벨이 울리면서 대피 방송이 나오면 어떻게 할까.

 우리는 3층이니 개를 안고 계단으로 후다닥 나가야겠다. 만약 외부 계단을 이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발코니에서 뛰어내리면 된다. 집 밖 화단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많으니 잘만 뛰면 어디가 부러지긴 해도 죽지는 않겠지.


 이사오기 전에 16년간 13층에서 살았을 때도 나는 침대에 누워서 가끔 걱정했다. 자다가 갑자기 탈출해야 하는데 문으로 나갈 수 없다고 치자. 우리 집 커튼과 이불을 다 모아 묶어도 13층 높이를 감당할 수는 없다. 완강기를 달면 안심일까 하고 아보기도 했다. 완강기는 10층이상 높이에는 설치할 수가 없다고 한다.


 지금은 3층이라 그때보다는 부담 없다. 이제는 들쳐업고 나가야 할 애들도 없고 노견만 안고 뛰면 끝이니 탈출 플랜이 단순해져서 한결 자신감이 솟는다.

 그래도 여름에 자던 차림으로 나갈 수 없으미드에 나오는 로브 같은 거라도 살까 하다 말았다. 여름 잠옷 위에 걸치쉬운 가벼운 겉옷을 가까이에 둬야겠다.

 비상대피 상황에 최소한 남에게 걸리적거리면 안 된다.  


 비상이다,  옷장을 열고 구석에 접어 둔 반팔 점퍼를 걸친 후 개를 안고 뛰어 나간다.  

 

그런데 우리 집에서 개 말고는 더 가지고 나갈 것은 없나?  


대략 이런 모습




 얼마 안 되는 금붙이가 있다. 비록 몇십만 원어치라 해도 피해를 입었을 때 보상이 어렵다. 그걸 어디 뒀나 버퍼링 하다가 깊은 곳에 잘 둔 기억이 났다.

 다음날 나는 금목걸이를 꺼내서 파우치에 넣고 가까운 곳에 두었다.

 다시 한번 극한 비상시의 시뮬레이션을 한다.


 비상이다, 옷장을 열고 반팔 점퍼를 걸치고 파우치를 주머니에 넣고 개를 안고 뛰어 나간다.


 어느 날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오는데 바람결에 그날 밤의 그 냄새가 났다. 역시 담배가 맞았다. 내가 알던 담배 냄새와는 살짝 결이 달라서 요즘은 담배 냄새도 예전과 달라진 건가 싶었다. 아무튼 그날 새벽에 다른 집에서 슬쩍 담배를 피운 것이다.

 이웃의 비매너 행동 덕에 나의 안전불감상태를 돌아볼 수 있었다.




 예전에 큰애가 집에다 항상 가족의 생존 가방을 만들어 놓았다. 지금은 따로 살면서도 가끔 우리 집 생존 가방을 업데이트해 놓고 간다.

 사실 얼마 전에 청소를 하다가 그 가방을 홀딱 버렸다. 이제는 뭐 전쟁이 난다고 피난을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집 버리고 떠나면 호텔에 가서 자면 되지 웬 생존 가방이냐 싶어서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만 봐도 각종 재난 재해들이 심심찮게 일어나고 험한 일들이 많다. 예기치 못한 지진과 산불, 수해, 사고 등으로 이재민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 '불안한 마음을 대비한다'는 생존 가방을 꾸려 놓는 게 손해 볼 일은 아니겠다 싶다.

 모두들 내게 일어날 거라고 평소에 상상도 못 한 일들을 갑자기 맞닥뜨리 것이 아닌가.

 생존 가방, 재난 가방 등을 인터넷에 검색하면 안전에 진심인 분들의 의견이 많이 나온다. 물, 방수매트, 침낭 같이 필수 항목에 각자의 상황에 따른 항목을 최소한으로 채운 배낭을 가까이에 두되 계절과 유통 기한에 따라 몇 개월 단위로 업데이트하라는 내용이 공통이다.


 일단 집에 있는 것들로 대충 꾸려서 현관장 안에 넣어 두었다. 암보험을 들어두면 암에 안 걸린다는 말이 위로가 된다.



물 두 병만으로도 고등학생 때 책가방 같이 무겁다

   


  생존 가방은 공동대피공간으로 피난했을 때도 유용할 것이다. 우리는 노견이 있으니 노견 사료 대용 통조림도 좀 사고 노견의 용품도 챙겨야겠다.

 그런데 찾아보니 우리나라 공동대피소에는 반려동물은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개와 함께 대피소에 들어갈 수 없다니 나는 대피소로 가고 남편은 개와 함께 노숙을....

 이 정도만 생각하기로 했다.


  


 

 놀랍게도 이런 허술한 준비만으로도 한결 안심이 된다.

 

 한밤의 재난뿐 아니라 한낮의 사고가 부쩍 많은 요즘 호신용품이 많이 팔린다는 씁쓸한 뉴스를 보았다.

 작년 봄에 남편이 필요할 수 있다고 삼단봉을 샀다가 얼마전까지 집에 보관중이었다. 그가 출퇴근 가방에 삼단봉을 다시 넣는 것을 보았다.


 삼단봉의 케이스에 이런 말이 적혀 다.

 

 사용하실 일이 없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뜨겁게 공감 가는 문구

 


 정말이지, 삼단봉도 생존 가방도 꺼낼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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