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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Nov 20. 2023

카톡방 조용히 나가기를 검색한 적 있습니까?

마음 약한 사람들의 카드

 네이버 검색창에  '카톡'이라 치면 '카톡 조용히 나가기'가 예상검색어로 가장 먼저 뜬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카톡방에서 조용히 나가는 방법을 찾는다는 것인가.  


 카카오톡에는 단체 채팅방에서 조용히 나가는 기능이 있다. 지난봄인가 업데이트 소식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떠올린 카톡방이 있다.

 그전까지의 카카오톡은 누군가 방탈출을 하면 나머지 사람들에게 '000님이 나갔습니다'라는 사실을 채팅방에 친절하게 제보했다. 어쨌든 시선을 끌며 나갈 수밖에 없어서 나오고 싶은 방도 나오지 못했다. 나는 처음에는 단순하게, 아, 이제 조용히 나가기 기능이 생긴다면 그 카톡 구치소에서 미련 없이 나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상은 달랐다. 기껏해야 7명, 11명 되는 방에서 누군가 조용히 나가면 얼마나 조용히 나갈 수 있냐를 따져 보면 부정적이었다. 

 그와 동시에, 뭐 굳이 그렇게 웬수 진 듯 도망 나올 필요가 있나, 그냥 다른 사람들 신경 안 쓰이게 '읽음 처리'하거나 가끔 한번만 들어갔다 나와도 되는데 하는 마음도 들었다.  

 조용히 나가기는 사실상 몰래 나가기와도 같고, 몰래 나가기는 결국 도망가기와 닿아 있었다.


 새 버전의 카톡은 나오고 싶은 카톡방을 조용히 떠나기조차 주저되는 사람들을 위해 특정 방을 '조용한 채팅방'으로 지정해서 내 채팅 목록에서 숨길 수 있게 해 줬다.

 조용한 채팅방으로 관리하면 빨리 읽으라고 추궁하는 새 톡의 빨간 숫자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일단 나오고 싶은 두 방을 적극적이고 과감하게(?) 몰래 나오는 대신 찜찜하지만 바로 보이지는 않게 뒤로 슬쩍 돌려놓기로 했다.


카톡 조용히 나가기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생각해 보면, 내가 나오고 싶어 하는 두 카톡방은 그 방을 만든 사람이 일방적으로 나를 초대해서 들어간 것이다. 둘 다 큰 카테고리로 설명하자면 '친목'이 주제인데 하나는 4년쯤, 하나는 10년도 더 된 듯하다.

 

 나는 왜 그 방에서 나오지 못하는가, 생각해 본다.  

 한때 좋은 시절에는 나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방이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서 변절한 사람을 굳이 색출한다면 그건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나를 뺀 나머지 사람들은 카톡을 올리는 비중은 다르지만 아직 변절하지 않은 충신들이다. 나만 처음의 호감이 변질돼서 이제는 읽지 않은 카톡이 300+가 되어서 몇 개인지 알 수도 없을 때 어물쩍 읽음 처리를 하고 있다. 

 판사 앞에 서서 '누가 죄인인가'를 따진다면 일방적으로 나를 초대한 그들보다, 변심한 내 죄가 클 것 같다. 그리고 '일방적으로'라는 말이 맞는가를 엄밀히 따지면 초대받을 당시의 나는 '그래, 초대해 주면 들어갈게' 정도의 공감이었음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좋았던 시절의 마음이 바뀌어 카톡방을 나오는 것은 정말 잘못인가, 생각해 본다.

 평생 사랑을 약속한 연인도 아니고, 내가 지어야 할 의무와 책임을 명시한 계약 관계도 아니고, 단지 '그래그래 우리 모여서 수다나 떨어보자' 하던 방에서 마음이 식어 떠나온다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무슨 소리야, 아무리 쉽게 엮인 관계라고 해도 한때는 '그래그래 우리 (지금 서로 좋으니까) 모여서 (마음속) 수다나 떨어보자' 하던 관계를 이제 떠나고 싶어 졌다는 것도 너의 일방적인 사정이니 네 잘못이지.


 이렇게 내 조그만 휴대폰의 수십 개 어플 중 한 어플 안, 수십 개의 대화 상대와 채팅방 중 새끼손톱만 한 두 방에 대한 판단이 오락가락하고, 그 방들은 점점 불편해진다.


 - 딸랑 일곱 명 있는 방에서 내가 나가면 분명 티가 날 텐데, 그냥 버티자.

 - 12명에서 11명으로 주는 건 몰라도 11명이 10명이 되는 건 좀 눈에 띄지? 그냥 있자.


 어물쩍하게 궁둥이를 들고서 언제 도망가나 재고 있는 나를 포함한 카톡방 멤버 숫자 711이 오늘따라 더욱 커 보인다.

   




 이제 애들 다 키우고 남편들은 퇴직을 카운트다운 하는 나이가 되어서 지인들과 자주 하는 말 중 하나는, '우리 이제부터 좋아하는 사람하고만 보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며 살자'이다.

 말로는 참으로 쉽게 거의 매번의 만남에서 다짐하듯 나눈다.

 응, 내가 이 나이에 뭐 남의 눈치를 보며 살아? 하며 꽤 나이 많은 사람인 척하는 호기를 부릴 때도 있다. 그렇지만 내 현실은 나오고 싶은 단체카톡방에서 다른 이들의 눈치에 짓눌려 감금을 계속하는 소심인이다.


 나는 재작년쯤 참기 힘든 가치관의 차이로 지인 한 명을 (소위) 손절했는데 그때 기분이 백 퍼센트 좋았던 건 아니다. 자주 만나면 만날수록 자꾸만 벌어지는 간격을 이런저런 방법으로 메꾸며 아슬아슬하게 몇 년을 지내왔다가 결국 내가 먼저 관계 포기를 선언했다.

 한 사람에게 이제 공식적으로 그만 보자고 한 일도 처음이었지만, 그러고 난 후 여전히 휴대폰 갤러리의 사진들에서 그를 발견하면 기분이 침침하다.

 물론 그때의 심정을 또 죽이고 여전히 그와 계속 보고 있었다면 다른 종류의 더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게 분명하니까 결과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늘 11명이 있는 카톡방에서 나왔다. 당당히는 아니고 슬며시 나왔다.

 여러 생각을 다 접고, 그냥 이 방의 카톡을 더 이상 궁금해하지 않는 나를 존중했고 그들의 대화를 안 보면서 기생충처럼 도사리고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렇다고 예의를 차린다고, 자, 저는 이제 이 방을 나갑니다, 그동안 즐거웠어요, 모두들 안녕히. 라며 굳이 평화로운 방에 찬바람을 일으키지는 말자고 생각했다. 

 몰라도 좋을 일은 저절로 알게 될 때까지 모르는 게 낫다.


 오늘이든 내일이든 그 방의 누군가는 나의 야반도주를 눈치챌 것이다. 어떤 사람은 내가 이미 짐을 다 싸서 문간에 줄곧 앉아있었던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근데 쟤는 대체 언제 나간대? 아주 거슬려 죽겠네.라고 생각해 줬었다면 더 고맙다.


 어쩌면 내가 그들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은 나에 대한 그들의 배려였을지도 모른다.

 그 옛날 좋았던 마음으로 나를 초대했던 주인도 이제는 구석에 찌그러져 도망칠 분위기만 내는 나를 속시원히 내쫓을 수도 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던 것이다.    

 

 열한 명 방에서 결국 떠나온 용기를 북돋아 조만간 일곱 명 방에도 깨끗한 흰 타월을 던져야겠다.

 저는 여기까지 할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떠날 수 있는 용기는 나도 좀 끼워줘,라는 말보다 어렵다.

조용한 채팅방은 과연 채팅방으로의 존재가치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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