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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Nov 17. 2023

오래된 욕실에 꽃을 놓으면

나이 든 집의 정겨움

#1. 그녀의 집


 며칠 전 한참 어린 주부의 말을 듣고 공감했다.


- 나는 집 꾸미기를 좋아하지만 인테리어에 그렇게 큰돈을 들여야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전용 20평쯤 되는, 그녀의 구축 빌라는 쓸고 닦고 돌본 흔적이 가득하다. 청소와 정리가 깨끗하게 된 공간은 살림과 육아에 최적인 동선과 안전에 집중돼 있었다. 벽의 일부는 좋아하는 색깔의 친환경페인트로 직접 칠해 포인트를 주었고 모양이 같고 크기가 다른 토분에 싱싱하고 푸른 식물을 키웠다. 가구만큼은 가격을 주고 하나씩 장만하며 적절한 곳에 적당히 놓인 소품은 자연 소재가 많다. 커튼이나 식탁보 같은 패브릭의 색깔과 질감이 집에 잘 어울려서 마치 늑한 숲 속에 있는 집 같았다.


 누구에 의해 어떻게 주도되는지 모를, 핫하고 힙하고 다하는 트렌드 인테리어를 했다는 집들이 다들 엇비슷한 데 반해 개성적이고 인상적이라서 집주인과 집이 기억에 남는다.   

 

 인테리어의 완성은 집주인의 부지런함과 센스라더니 맞는 말이다.

 




#2. 23년 된 작은 욕실

 

 트렌디 인테리어와는 거리감이 있는 우리 집에서도 가장 아픈 손가락은 안방 욕실이다.

 우리 안방에 딸린 작은 욕실은 2000년 가을, 아파트 입주 당시 그대로다. 2000년대 초반을 향유한 '드라마 부부클리닉 사랑과전쟁'에서나 봄직한 카운터형 세면대가 있고(그래도 자주색은 아니다) 어디서 본 듯한 상가건물 공용화장실이 연상되는 패턴의 벽타일에다 수전이나 수납장 등도 당시 제품이다.

 큰딸이 대학생일 때 이 욕실을 보고 '우리 학교 기숙사랑 똑같네'라 했었다.

 

 역시 좁은 욕에는 아것도 꺼내 놓지 않는 게 최선이다.

 작년에 양변기의 물탱크 뚜껑 모서리가 깨져서 남편이 나무판에 손잡이를 박아 뚜껑을 만들어 덮었다. 뚜껑을 열 일이 전혀 없어서 나무판으로 만들어 덮었다는 사실도 잊었다.  

 

 어쨌거나 돌봄의 손길이 닿는 곳이다.

가능한 한  수납장 안에 숨긴다

 

 욕실장을 정리한다. 작은 장이라 크게 정리할 것도 없다.  

 플라스틱 욕실장 깨지거나 곳은 없고 전체적으로 누리끼리한 색인데 흰색이 바랜 것인지 원래가 저런 색인지는 모르겠다.


 머리숱을 채우는 미용용품들이 세 가지나 나왔다. 확 치고 들어오는 씁쓸함이란...... 

 스프레이식 흑채, 끝에 둥근 스펀지가 달려 톡톡 두드리는 스틱형 제품, 화장품 콤팩트처럼 퍼프를 이용해 빈 부분가리는 제품이었다. 몇 년 전 정수리 쪽 가르마가 갑자기 넓어진 것을 느끼고 충격을 받아 구입한 것들인가 보다.

 

 주부들은 한두 번 쓴 종이 가방도 멀쩡하면 그냥 버리기엔 아까워서 튼튼하고 예쁜 것들을 따로 모아 둔다. 길이와 너비가 적당한 쇼핑백을 활용해 간단히 수납박스를 만들었다.

쇼핑백으로 만든 수납박스


 남편이 쓰는 용품들 작은 플라스틱 바구니에 보관하고 있었는데 같은 용도끼리 만 다시 했다.

 무엇을 얼마나 자주 쓰는지 몰라서 맘대로 버릴 수 없다. 하나씩 꺼내 쓰는 리필 면도날이나 치간칫솔은 작은 쇼핑백에다 포장채  수납장 구석에 세워 두었다. 마침 크기도 맞고 두꺼워서 그 용도에 딱 좋은 종이백이 


 정리를 마쳤다. 맨 위에는 에코백을 바구니처럼 접어서 한 달에 한번 꺼내는 여성용품을 수납했.

 문을 닫아도 밖으로 노출되는 바깥 부분에는 디퓨저와 화장실 에티켓용 향수병을 놓았다. 맨 위쪽에 있는 건 입욕제인데 예쁜 입욕제를 실에 놔둔 선배 언니를 따라 했다. 입욕제 자체연한 향기가 나지만 가루를 굳힌 재질이라 생각날 때마다 향수를 뿌려 두면 향이 지속되는 장점도 있다.

정리를 마친 안방 욕실 수납장




 #3. 9거실 욕실


 리모델링 한 지 10년이 다 돼가는 거실 욕실도 보기에 멋있지 않다는 것 외에 문제는 없다. 세면대와 욕조의 배수구는 막힘 없이 관리하고 눈에 보이는 오염이 없게 한다. 

 오래된 욕실 청소에는 매직블록이 필수다. 매직블록은 연마 방식으로 오염을 제거하므로 스크레치를 낼 수 있어서 새 집 살림에는 쓰지 않는 게 좋다. 대신 오래된 욕실 청소에는 특화돼 있다. 욕조, 수전, 거울까지 닦아 광택을 내는 데에 어느 세제보다 가성비와 가심비가 높다.

찢어 쓰는 매직블록


 얼마 전에 실리콘 비슷한 재질의 욕조 미끄럼방지 매트를 샀다. 

 노견을 씻길 때 깔면 바닥이 폭신하고 안전해서 좋고 누가 집에 올 때 스크래치가 많은 낡은 욕조 바닥에 슬쩍 깔면 깨끗 보다.

 그러나 저대로 마냥 놔두면 물때가 끼어서 일거리가 생긴다. 

 매트도 필요할 때만 깔았다가 평소에는 집게고리에 매달아 한쪽에 걸어 둔다.

이케아 욕조 매트


 욕실의 골칫거리 중 하나는 스테인리스 샤워 줄이다. 틈새 관리가 힘들다. 요즘은 물때가 안 낀다는 신소재 샤워줄이 나오긴 하는데,  제품은 스테인리스 줄처럼 수전에 착착 감기지도 않고 이리저리 잡아 쓰는 동 따라 편안하게 떨어지는 맛이 없다.

 스테인리스 줄도 6,7천 원이면 새로 사니까 틈새 청소에 스트레스받지 말고 바꾸자.

 

 거실 욕실 수납장은 작은 욕실보다는 좀 크지만 울이 문에 붙은 여닫이 방식이요즘 스타일의 수납장보다 수납력과 모양면에서 떨어진다. 그래도 아직 튼튼하다.

 수납장 위에 둔 바구니 두 개에는 여분의 정수 필터가 가득하다. 20년 넘은 구축 아파트다 보니 집안의 모든 수전에 정수 필터를 부착하여 사용한다.

 가운데 칸은 수건을 두는데 미니 압축봉을 질러 놓으니 수건을 넣고 꺼낼 때 굴러 떨어지지 않아 좋다.

 이 욕실장 안에 쓰지 않는 물건은 없다.


 작으면 작은 대로 쓰게 된다.

하긴 수납장이 더 커도 둘 게 없을 것 같다


 우리 가족은 큰 목욕 수건을 좋아한다. 샤워 후에 목욕 수건은 꺼내 쓰기 좋게 위쪽 선반에 따로 담아 두었다. 욕실용 방수 시계도 모던하우스에서 산 지 20년은 넘은 듯한데 여전히 고장 없이 잘 간다.

 원래는 시곗바늘 색깔과 똑같은 하늘색 나일론 줄이 달려 있었는데 너무 튀어서 내가 마끈으로 바꿔 달았다.

 나름의 디테일한 센스다.

바구니도 한번 사면 몇십 년을 쓴다




#4. 그리고 우리 집에게


 그동안 살면서 마루도 깔아보고 싱크대도 바꿔보고 욕실도 바꿔봤지만, 누수 같은 큰 문제가 아닌 이상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을 고치는 일은 웬만하면 하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전에 살던 집에서는 욕실에서 누수가 생겨서 아랫집에 피해를 줬다. 그래서 방수 작업부터 다시 하며 욕실을 싹 고치고 아랫집의 얼룩진 부분은 도배를 새로 해 주었다.

 예정에 없던 새 욕실을 갖게 되어 뜻밖에 좋은 면이 있긴 했지만 그 며칠간 몸도 마음도 고단했던 기억이 난다.  

 

 동네 한바퀴 돈다고 자전거를 타고 나갔던 남편이 노란 소국 한 다발을 사 왔다. 나는 꽃다발에서 꽃가지 하나를 빼서 욕실에 따로 놓았다.  

 수수한 공간을 채우는 조그만 꽃의 생기와 향기가 놀랍다.

국화가 꽤 오래간다


 예쁘지는 않지만 온수냉수 잘 나오고 잘 빠지고 이웃집에 누수 없고 기본 기능을 잘해 주는 오래된 욕실이다.

 나이 들고 정겨운 우리 집이 고마워서 그저 구식이라는 이유로 미워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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