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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Dec 22. 2023

동네 한의원에서 마케팅을 배운 날

한의원 첫 구경

  친구가 아무래도 근처 한의원에 가봐야겠다고 했다. 며칠 전 아침에 일어났는데 갑자기 한쪽 어깨가 너무 아프기 시작했고 그 후 통증이 옮겨다니기만 하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다니는 데가 없냐고 물었더니 한의원에 한 번도 안 가 봤다고 했다.

 나도 한의원에 안 가 봤다. 주변에서 '담이 걸리거나 삐끗한 데는 한의원이 낫다', '감기는 한약이 잘 듣는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그러고 보면 종종 약국에서 병 쌍화탕을 사서 따끈하게 데워 먹기 좋아하면서 한의원에 아직 안 가 본 게 이상하긴 하다.   


 요즘은 건물 하나에 한의원이 하나씩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빌딩 하나에 치과 하나, 한의원 하나.  

 친구의 통증 부위가 어깨부터 등이다 보니 진료받기에 편안한 여자 한의사로 한정해서 웹지도를 검색했다.

 우리가 있던 카페에서 20미터 내에 여의사가 하는 한의원이 있었고 후기도 괜찮았다.

 마침 나의 운동클럽 코치님이 발가락을 접질려 반깁스를 하고 있는데 선배 회원님들이 빨리 한의원에 가라고 한 마디씩 하는 것을 목격한 참이라 나도 구경 삼아 따라가겠다고 나섰다.   

 한의원은 어떤 분위기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첫 한의술을 경험할 친구의 생생한 감상평도 듣고 싶었다.

 그리고 일반 병원과는 다르다는 초진료 포함 의료 비용이 가장 궁금했다.




   

 자동문의 환영을 받으며 들어서자마자 슬리퍼로 갈아 신어야 했다. 신발을 락카에 넣은 후 안쪽에 있는 접수대로 가는 독특한 구조였다.

 병원 내부는 호텔 로비처럼 세련되고 청결했다. 신발을 신지 않는 공간이라 더 깨끗한가 보다.

 친구가 접수를 하는 동안 병원 안내를 보니 남자 선생님 세 분의 사진과 소개글이 있었다.

 

 - 어? 여기 여자 선생님이 하시는 데 아녀요?

 

 내 말에 친구도 이름을 쓰다가 멈췄다.

 저희는 원래 남자선생님만 세 분이 하시는데요,라는 답을 듣고 우리당황했다. 여자 의사는 병원 선택의 첫 번째 조건이었다. 어디선가 검색의 오류가 있던 것이다.

 '아, 저희는 여자선생님을 찾아온 거라서요.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돌아나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인데 친구와 나는 망설였다.


 문득, 신발을 벗어 수납장 안에 넣고 들어왔다는 한 단계의 과정이 우리의 후퇴에 장벽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돌아서면 곧바로 나갈 수 있는 상태'인 것과 '돌아서서 몇 걸음 걸어가서 락카를 열고 내 신발을 꺼내서 슬리퍼와 바꿔 신어야 나갈 수 있는 상태'라는 격차는 즉각적인 행동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그 순간에는 그곳을 나가는 과정이 굉장히 번잡스럽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나와 같은 기분이었는지 친구도 최우선 조건을 순순히 포기하고 접수를 마쳤다. 나는 눈빛으로 "괜찮겠어?"라 물었고 친구는 소리 내서 '어차피 의사 선생님이니까"라고 대답했다.

  

 접수를 받은 간호사가 언제부터 어디가 어떻게 불편한지 그리고 실손보험이 있는지 물었다.

 환자의 동의만 있으면 포스기에서 보험 가입 내역을 조회하고 보장 내역을 찾아 준다고 한다. 실손보험은 세대별로 보장이 다르니 환자로서는 내 보장 내용을 확인할 수 있어서 좋고, 병원으로서는 어떤 종류의 비급여 치료까지가 환자에게 부담이 없고 우리에게 수익이 높은 지를 파악할 수 있어서 좋다.

 친구의 보험은 1세대라 약침, 뜸 등의 웬만한 비급여 치료비를 돌려받을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환자들이 가장 민감하게 느낄 병원비 장벽의 높이를 쟀으니 서로에게 좋은 치료 범위를 정하기가 용이하다.


 친구가 들어가고 나는 대기실에서 커피도 내려 마시고 주위를 둘러보며 시간을 보냈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과 좋은 향기 그리고 적당한 조명들은 한의원의 대기실이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음악 소리 외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 잠이 올 것 같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다. 기다린 지 45분이 넘었다. 한의원 치료가 이렇게 오래 걸리는 줄 알았으면 먼저 간다고 말할걸 하며 벽에 기대 눈을 감는데 나를 정면으로 보고 있는 감시 카메라와 눈이 마주쳤다.

 여기서 자면 이상한 아줌마 같아서 친구가 놓고 간 옷과 가방을 추스르는 척했다.





 아무래도 너무 늦어져서 먼저 간다는 톡을 남겨야겠다고 일어선 순간 친구가 나왔다. 괜히 기다리는 나 때문에 편하게 진료를 받지 못했겠구나 싶어 미안했다.


 수납을 하려는 친구에게 갑자기 간호사가 지금 마시라며 한약 파우치를 뜯어 주었다. 한의원 초행자에게는 뜬금없는 포인트였다. 오랜 치료에 살짝 넋이 나간 친구는 입에 파우치를 문 채 가방 챙기랴, 약 마시랴, 카드 꺼내랴 부산해서 보는 사람이 다 어수선했다.  

 오늘 진료비와 처치비, 그리고 앞으로의 치료 비용까지 총 67만원이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에? 육십칠만 원이라고요?


 나는 친구의 병명이 뭔지, 앞으로 어떻게 치료할 계획인지를 전혀 모르므로 진료비가 비싸다 싸다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한 시간 전까지 상상했던 한의원의 플로우와는 상당히 달라서 몹시 놀랐다.

 자고 일어나서 아픈 어깨에 67만원을 결제하게 될 줄이야.


 한의사 선생님은 친구가 좋지 않은 자세로 오랫동안 생활해서 근육통이 쌓이고 쌓이다 이제 터진 것이며, 원래는 마흔 초반에 왔어야 할 사태가 환자의 기초 근력 덕에 오십 초반으로 늦춰진 것이라고 하셨단다. 그리고 지금 어깨와 등 근육이 다 망가진 상태이며 설령 오늘 치료 후에 좋아진다고 치료를 계속하지 않으면 2년 후에는 아산병원에서 수술 날짜를 잡고 있을 거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번에 치료를 완료하지 않으면 2년 후엔 수술이다', 아픈 사람에게 이렇게 확실히 꽂히는 워딩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한 시간 이상 소요되는 치료를 총 20회 받는 것이 67만원이면 비싸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예후를 봐 가면서 진행하는 것이 아니고 정해진 20회의 비용을 한 번에 선결제하는 것은 나로서는 뜨악했다.

 내가 한의원의 방식을 몰라서 그런 것일까?


 다행히 친구는 한 번의 치료만으로도 몸이 한결 좋아졌다고 했다.

 그러면 됐지, 뭐. 그리고 실손보험으로 보상받을 수 있다니까 손해는 아니다.

 아마 1세대 보험 가입자가 아닌 나였다면 27만원 쯤의 플랜을 제시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동네 한의원의 입구에서 출구까지의 짧은 여정에서 마케팅 기술을 배웠다.

 그렇잖아도 퇴직 후에는 국숫집을 해 보고 싶다는 남편 때문에 매장 컨셉이나 마케팅 전략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어서 값진 배움이었다


 1. 뒷문 닫기 - 입장하기 전에 신발을 갈아 신음으로써 생기는 사이드이펙트가 있었다. 일단 나의 매장에 들어선 고객이 쉽게 돌아나가기 힘든 장치를 배후에 둔다.

 2. 지피지기 - 고객이 얼마만큼의 지불 여력과 의지가 있는지, 나는 그에 맞게 어떤 서비스를 내밀 수 있는지 서로의 체급을 파악한다.

 3. 쥐덫 안의 치즈 - 약을 뜯어 주며 바로 마시라고 한 순간 깨달았다. 우리만의 하우스 서비스나 맛보기 음식 등을 제공함으로써 고객이 거절하기 힘들게 만들어 심리전에서 승리한다.

 

 내 예상 밖의 진료비는 당연히, 반드시 필요한 치료의 결과였다고 믿는다.  

 실손보험 보상이 가능하다는 이유로 높은 진료비가 발생되면 결국 손해를 받는 것은 환자와 선의의 보험 가입자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오늘 같은 날씨에는 쌍화차가 딱 좋다.

요맘때 나의 최애 쌍화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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