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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Dec 20. 2023

당사주 이야기

주의 때로는 위안

 시아버님 생신 기념으로 모인 자리에서 반가운 시누이를 만났다. 남편과 연애 시절, 군복무 중인 남편을 면회하러 갔다가 나보다 먼저 면회를 와 있던 시누이를 처음 보았다. 우리는 한 살 차이였고 둘 다 친자매가 없다는 점, 사람들에게 낯을 가리지 않는 성격  등으로 금방 친해졌다.

 지금도 나는 시누이를 만날 수 있어서 시댁 모임이 즐겁다.

  

 시누이는 렇다 할 명을 받은 것은 아닌데 일상생활에 불편을 주는 자잘하고 다양한 병증들을 가지고 있다. 겉보기에는 말짱하다. 오히려 늘 생기가 넘치고 꼿꼿한 이미지이다. 요즘은 별안간 눈의 초점이 여러 개로 보이는 복시 때문에 힘들다고 했다. 안과에 가면 난시에 노안이라 하고 내과에 가면 빈혈이라 하고 산부인과에 가면 갱년기 증상이라고 한다는데 아마 모두가 합쳐진 것이 아닐까 싶다. 뇌도 찍어보고 병원에서 하라는 검사는 다 했는데 원인이 딱히 없니 답답하다.


 나란히 앉은 차 뒷좌석에서 시누이가 말했다.


 - 지금 생각하면 옛날에 본 당사주가 딱 맞는다. 거기 보면 내가 방 안에 앉아있는데 옆에 약탕기가 끓고 있어. 그리고 마당 구석에서 남편은 담 너머로 지나다니는 여자들을 기웃거리고 있거든. 봐봐, 나는 맨날 이런저런 약을 먹고 있지, 고모부는 아직도 여자를 저렇게 좋아하지.


 그렇다고 시누이의 남편이 바람을 피우거나 속을 썩인 것은 아니다. 원래 성향이 여성들에게 친화적이고 관심이 살짝 많은 편이란 소리다.  

 그 당사주가 맞다 해도 어쨌든 약을 먹으면 관리할 수 있는 병이고 남편도 담 밖을 기웃거리기는 하지만 외간 여자와 달아나거나 손을 잡고 있는 장면은 없으니 시누이의 당사주도 나름 쏘쏘다. 


 -아, 너도 어릴 때 당사주 본 적 있다고 그랬지?




 

 나는 당사주가 사주풀이를 그림으로 표현한 것인 줄 알았는데 중국 당나라에서 발전해 온 점성술로서 현재 우리가 아는 명리학과는 다르다고 한다. 아마 내가 어릴 때 본 화려한 그림이 가득한 당사주책은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었나 보다.


 내가 초등 아니 국민학교 저학년이던 1980년대 초반까지 우리 동네에 당사주책을 들고 다니며 돈을 받고 운세를 봐 주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그우리 가족은 친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우리 할머니는 옆집에 만신(무당) 이웃이 있어 이슈가 있을 때마다 소통하셨는데도 굳이 지나가는 그 할아버지를 불러 마루 끝에 앉아 당사주를 보곤 했다.  

 햇빛 아래 펼쳐진 그림들이 매우 화려하고 적나라해서 무서웠다. 조선시대가 배경인 듯 한복을 입은 사람들과 기와집, 초가집이 나왔다.

 한글을 모르던 우리 할머니는 열몇 명이나 되는 자식들, 손주들 당사주를 돌아가며 다 물어보셨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 할머니의 마음에 들게 나오는 당사주 그림은 기억했다가 그 할아버지가 오면 또 찾아보여 달라고 했다


 열 살 무렵에 할머니와 함께 마루 끝에서 본 당사주책에서 기억에 남는 씬들이 있는데 지금은 그게 내 껀지, 막내고모 껀지, 누구 껀지 모르겠다.  

 


 꽃나무가 흐드러지게 핀 마당이다. 고운 한복을 입은 여자가 꽃나무 그늘 아래에서 꽃향기를 맡고 서 있다. 담장 밖에는 논밭이 펼쳐져 있고 흰 옷을 입은 남자가 누렁소를 몰고 일을 하고 있다.

 -> 해석 : 아내는 안전한 집 안에 머물고 남편은 밖에서 일을 한다. 전근대의 가치관에서 이런 장면은 전형적인 좋은 운세다.


 화려한 병풍 앞에 젊은 부부가 술상을 놓고 앉아 있다. 앞에는 종인지 자녀인지 몇 명이 더 앉아 있다. 그림 구석 쪽에 살짝 접힌 병풍 뒤로 여자 하나가 앉아 있는 게 반쯤 엿보인다.

 -> 해석 : 남편 옆에 평생 요화(요사스러운 꽃, 내연녀)가 있을 운세다. 긴긴 인생에서 일어나는 주요 장면을 몇 장의 그림으로 요약하는 당사주의 구조를 감안할 때 이런 장면이 선택되어 나온다는 것은 남편의 외도가 하루이틀이나 일이 년의 문제가 아닌 상습이라는 것이다.


 

 당사주책은 병풍 뒤에 숨어 있는 여자, 능소화를 늘어뜨린 사모를 쓰고 말을 탄 남자 같은 그림으로 풍파와 형통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그림에 결들인 한자와 한글 병기 해설에는 '이 사주는 반드시 이렇게 된다'는 단정적인 표현도 많고 '자궁에 살이 들어서 슬하에 아들이 없다'는 언어폭력이 빈번하다. 그래서 사주나 궁합이야 말로 '오랜 역사를 누리며 널리 용인되는 가스라이팅'이라는 말이 있나 보다.


부부를 위기로 모는 요화가 담 밖에 서서 보고 있다(당사주 그림의 예)-다음 검색

 



 

 열 살의 내가 할머니 옆에 앉아 당사주 그림을 함께 보던 1980년대와 지금은 완전히 딴판인 세상이다. 고대 아라비아에서 유입돼 당나라 사람들의 의식과 가치관에 맞춰 발전했다는 당사주는 더이상 의미가 없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면, 아무리 생활양식이 바뀌고 대중의 가치관이 바뀌어도,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살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병들어 앓고 죽는 평생 여정의 근본은 똑같다.

 옛날에는 암에 걸리면 죽었지만 지금은 암을 고쳐 더 살 수 있다는 점만 다르지 '암에 걸린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새해가 오면 재미로 혹은 기대감으로 신년운세를 보는 사람들이 많다. 무료로 인터넷에서 볼 수도 있고 여전히 070 전화로 운세를 보는 사람들도 있다. 

 인생은 어차피 한 시간 이후를 모르고 사는 것이니 운세 따위 안 보고 안 듣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살아가는 게 제일 좋겠지만, 만약 운세를 보게 된다면 무엇이든 내 입맛에 맞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 

 예능프로 무물보를 보라. 의뢰인이 막무가내로 뽑은 깃발을 자기들 편의대로 어찌나 잘 갖다 붙여 해석하는지 말이다.

  

 내가 어릴 때 본 그 병풍 뒤의 여자 그림이 내 사주였대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병풍 뒤에 앉아 있는 여자는 별로 대미지가 없다. (병풍 뒤로 뜨거운 물을 확!)  


 사실 이 나이에는 남편을 유혹한다는 고운 한복의 요화들보다 내 옆에서 끓고 있는 약탕기에 더욱더 쓸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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