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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Dec 08. 2023

우리끼리 김장하기, 미션 클리어

몸도 아프지 않고 마음도 즐거운 김장의 비결

 친구가 친정에 가서 자매들과 함께 김장을 하고 와서는 허릿병이 났단다. 집 앞에서 잠깐 봤는데 허리가 울리고 아파서 웃지도 못한다며 복대를 감고 있다. 언니 한 명이 못 와서 그 집 거까지 갖다 주고 오느라 더 힘들었다고 푸념이다.  

 딸이 대입 수험생인 올해는 유난히 힘들었고 허리 때문에 며칠째 고생이라 내년부턴 안 한다고 말했단다.  


 이맘때면 여러 가족이 모여서 많은 양의 김장을 같이 하는 집들이 있다.   

 먹을거리는 무조건 넘치게 챙기는 것이 곧 사랑이라고 믿는 어머니들은 자식이나 형제자매, 동네친구 등 아끼는 존재에게 김치를 나눠주 기쁨 때문에 관절염과 근육통으로 사나흘 고생하더라도 백 포기, 이백 포기를 기꺼이 담그신다.

 보람찬 이벤트를 다 같이 모여서 하면 좋다고 딸아들이나 며느리사위가 일손으로 참여하는데 내 친구의 경우처럼 각자의 처지가 다르다.

 (아마 시어머니도, 자신의 시어머니가 진두지휘하는 김장에 며느리로서 참여하는 것은 싫어했을 것이다.)

 결혼한 여자들은 알겠지만, 친정이건 시댁이건 우리 집이건 일단 모여서 뭘 하면 사람들의 끼니를 차려내고 치우는 것만으로도 일거리가 상당하다.


 우리 시어머니는 매해 김장을 언제 한다는 말 없이 김장을 하신 다음 우리 집에 택배로 보내주셨기 때문에 며느리로서 시댁에 김장을 하러 가야 한다는 담이 없었다.

 김장김치는 항상 시어머니에게서 받아 오고 친정엄마에게서는 수시로 김치를 갖다 먹었다.

 어른들께 무척이나 감사하고 이것은 나의 행운이라 생각한다.  

 

 딱 한 번, 양 많은 김장에 크게 데인 적이 있다.

 시부모님은 직 후 몇 년간 전원생활을 하시며 밭도 가꾸셨는데 배추를 심지는 않으셨었다.

 어느 주말에 그 해 김장을 하러 내려오라고 하셨다. 밭에서 배추를 뽑아와서 김장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배추 트럭이 어느 밭에서 온 건지, 그때 누구누구랑 같이 했었는지 등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애들이 다 어릴 때라 아마 각 집의 애들까지 다 모였을 것이다.

 그저 '밭에서 배추를 가져와서 한다'는 사상 최초의 1박2일 김장행사가 어떤 건지 전혀 모르고 (수육도 먹고 맛있는 거 먹는다는 것에 신이 나서) 시댁에 갔다.

 역시 때로 모르는 게 약이고 뭘 몰라야 겁 없이 덤비는 법이다.


 아주버님과 아버님을 포함한 남자들이 밭에 가서 배추를 뽑아오기를 기다리며 어머니와 여자들은 시댁 마당에다 애들 네댓은 들어가 물장난을 할 만한 자이언트 사이즈의 자주색 고무대야를 놓고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하고 소금 포대를 끌어오고 등등 사전 준비를 했다.

 나는 시댁에서는 '일은 잘 못 하고 말만 많은 막내며느리'라는 캐릭터로 20년 넘게 꾸준히 활동 중인 데다, 시어머니는 대파를 다듬는 단순한 일까지 본인이 직접 하셔야 마음에 차는 분이시다. 그래서 그때도 나에겐 중요도 별 반 개를 줄까 말까 고민해도 아까운, 잡다한 것들을 시키셨을 것이다.

 예를 들면, 주방에 가서 플라스틱 바가지를 있는 대로 모아 와라, 김치냉장고 오른쪽을 열고 생강과 마늘을 찾아 가져와라, 이층 베란다에 가면...... 같은 주문들이다.

 그렇지만 전담 포지션이 정해져 있지 않고 아무거나 시키는 대로 해야 되는 잡부가 더 힘들 수 있다.   


 아무튼 1박2일의 김장이 끝나고 바리바리 담아 주신 김치통을 트렁크에 싣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편에게 말했다.


 -나, 다시는 김장하러 안 간다.


 시댁에 가면 항상 일을 제일 많이 하는 남편도 삭신이 쑤신다더니 다음 날 출근길에 팔자걸음을 걸었다.




 

 결혼 26년 차인 나는 이번에 네 번째 김장을 했다. 우리 가족만의 김장 독립을 한 지 4년이 된 것이다.

 시어머니도 점점 힘이 들어 김장을 하기 싫다 하시고 자식들도 이제 고만하라고 말씀드리며 4년 전부터 우리 집 김장은 우리가 알아서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무리 조금이라지만 김장을 하려니 어리둥절했다. 좋은 절임배추를 사더라도 양념 비율이 안 맞으면 맛없는 김치를 일 년 내내 먹어야 하고 결국 처치곤란이 될까 걱정이 됐다.

 김치를 많이 먹지도 않으니 그때그때 사 먹을까 생각했다. 김치가 필요할 때마다 맛있다는 제품들을 하나씩 사 먹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우리는 김장 독립 원년부터 온라인 마켓에서 절임배추 20킬로와 김치양념 10킬로로 구성된 4인가족김장패키지를 구입해서 김장을 한다. 맛 고민이 없게 스탠다드한 대기업 김치양념을 베이스로 하고 거기다가 재료들을 더 넣는다.

 시즌에 맞춰 미리 사 두는 최고급 육젓이나 생새우, 생강과 마늘, 양파, 쪽파, 시원한 맛을 낸다는 청각, 시어머니가 주시는 고춧가루 그리고 여수돌산 갓과 무 등이다.

 올해 기준 김장의 총비용은 (최고급 육젓 옵션을 빼고) 15만원정도로 추산되고 12리터 큰 통 세 개 가득 배추김치를 채우고 양념이 남아 섞박지를 좀 더 담갔다.

 

 처음 김장을 할 때는 우리 집에 새로 생긴 행사라며 딸들까지 모였지만 한번 해 보니 남편과 둘이 재료 준비부터 마무리까지 다 해도 두어 시간 이내에 힘들이지 않고 끝난다.

 올해는 절임배추를 건져 놓고 재료 손질도 해 놓고 오전 운동을 다녀온 여유도 생겼다.

 

 마침 김장하는 토요일에 집에 온 큰딸은 우리가 일할 동안 노견을 돌보다가 저녁에 수육 해서 새 김치랑 먹고 갔다.

 가끔 보는 엄마가 김치 담근다고 힘들어하거나 앓아눕지 않고 기분이 좋으니 내 딸도 마음이 편할 것이다.

4인가족 김장패키지는 12리터 김치통 3개 나옴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힘이 들어도 즐겁다.

 모든 일이 마찬가지겠지만, 진심으로 즐거운 김장을 하려면, 내가 하고 싶을 때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야 한다.

 

 나는 내 집에서, 나 먹을 만큼만, 내 맘대로 하는 김장이 즐겁다. 어쩐지 내가 한 김치는 양념과 국물도 선뜻 버리지 못하고 청국장찌개나 순두부찌개 같은 것에 넣거나 활용해서 아껴 먹게 된다.

 

 아니 그리고 이번 김장은 또 왜 이렇게 맛있게 됐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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