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 한강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지성사, 2013, 131쪽 '서시' 중에서
'인생'과 '운명'은 확실히 동의어가 아니다. 그러나 따로 볼 수 없는 긴밀한 사이의 말들이다.
'인생'이 '운명'을 포함하는 단어라거나 '운명'이 '인생'을 포함한다고 보는 게 맞다. 서로 같은 크기는 아닌데 서로가 서로를 포함한다는 뜻을 벤다이어그램으로 그려낸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불평등하다. 우리가 어디서 언제 무엇으로(성별, 형제 순위) 태어날 것인지에 의견을 낸 것이 아니고 그야말로 주최 측의 랜덤추첨이다.
태어나 보니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게 되었다. 사회학자들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것도 행운의 하나라고 입을 모은다. 객관적인 요건들을 비추어 크게 부정할 수는 없다.
기왕이면 넉넉한 집에서 기왕이면 비주얼 좋고 머리도 좋게 태어났으면 좋았을 것을, 많은 것들이 유전자로 결정되고 천성으로 주어진다고 하니 재미가 없다. (심지어 행복을 쉽게 느끼는 마음도 유전자로 이미 정해진다)
내게 주어진 운명을 수용한다는 것은 인생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에게도 힘든 일이다. 나의 현재 인생의 상태를 인정하고 불평하는 대신 무소의 뿔처럼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미션이다.
하루가 다른 지능디지털 기술혁명(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여전히 개인의 미래를 불안해하고 결정할 일을 감당하지 못해서 예지를 가졌다는 낯선 이에게 해답을 묻는 사람들이 있다.
열두 가지밖에 되지 않는 띠별 운세나, 한 해에 몇 십만에서 몇 백만 명이 태어나는 출생연도별 운세, 생년월일시를 주축으로 하는 사주팔자를 따져 묻는다. 관상이나 손금, 성명학도 있다. 그쪽을 믿는 사람들은 똑같은 사람의 똑같은 의문에도 봐주는 사람에 따라 대답은 제각각 다르다는 모순을 쉽게 무시한다.
몇 달을 기다려서 몇 만 원을 내고 역술인의 답을 듣는 사람들이 꽤 많지만 피부과나 성형외과도 가는 사람들이 계속 가는 것과 마찬가지 같다.
인생에 대한 태도는 위기에 처했을 때 더욱 중요하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로 유명한 빅터 프랭클은 '시련을 가져다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라고 역설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잃고 소매에 새긴 번호로만 취급되며 언제 어떻게 삶을 마감할지 모르는 나치 수용소에서도 끊임없이 의미를 부여하며 하루하루를 살아냈다.
아무런 희망의 여지가 없고 창 밖에는 죽음의 밀실만이 기다리는 상황에서 인간의 태도는 다양했다. 당장 오늘 오후에 내 생사가 어찌 될지 모르는 현실에서 자신을 놓아버리고 술을 마시고 스스로를 포기한 채 죽는 사람도 있지만 유머를 하고 동료들에게 빵을 나눠주고 무엇이든 메모하거나 마당의 먼지 속에 핀 들꽃을 돌보는 사람도 있다. 수용소에 갇혀 신체의 자유를 잃었으나 삶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는 자유를 잃지는 않았다. 프랭클 박사는 거창한 삶의 의미보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소소한 목표를 자주 확인하고 지키려고 하는 행동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인터넷에 유행하는 소위 '누구누구적 사고'라고들 하는 것들도 이미 엎질러진 인생을 좀 더 잘 살아보자는 몸부림이다. 남의 사고를 따라 할 게 아니라 내가 자주 하는 말이나 하고 싶은 말로 나의 사고를 규정해 보자.
나 000적 사고 - '될 대로 돼라'라고 내 할 일만 잘하면 '뭐든 되겠지' 이런 식으로.
이제는 현대인의 기대수명은 100세를 가뿐히 넘어 120, 140세까지라고 떠들어대지만 젊디 젊은 2, 30대의 일 년과 생의 트랙을 반 넘게 지난 5,60대의 일 년은 완전히 다르다. 모든 것이 젊은 나이의 한 주, 한 달은 그 성취 속도나 업그레이드 속도가 고속열차 급은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모든 성능이 하향 곡선을 그린다.
50대 중반인 내가 시니컬하게 말하면 노년이 깊은 나이에서는 90세나 120세나 별 반 차이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지나간 일은 잘한 것보다 아쉬운 것이 기억에 남아 항상 이렇게 할걸 하는 마음이 든다. 시간이 지날수록 후회의 대상이 되는 기간이 많아지니까 당연하다. 이때도 과거의 내가 그때 최선이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기왕이면 후회보다 행복한 일을 회상하는 것이 낫다.
성과가 좋았다거나 칭찬을 크게 들었다거나 하여 자랑스럽던 순간을 반복해서 추억하는 것도 좋겠다.
나태주 시인은 '꽃은 아무 표정 없이 거기 있다. 내가 웃으며 꽃을 보기 때문에 꽃이 웃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 외부 환경 자체가 아니라 외부에 대한 나의 시선과 태도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요즘 트렌드로 바꾸면 'AI가 제시하는 알고리즘을 따라 나는 그런 사람이구나 하며 가스라이팅을 당하지 말고 내 알고리즘은 내가 만들어 가자' 정도의 말이다.
한평생 내내 내 마음에 드는 인생으로 사는 사람은 찾기 어렵다. 모두의 부러움을 받는 유명인이나 황금 티스푼을 쓰는 산유국의 왕자라도, 세계 최고의 스포츠 스타나 가수라도 화려한 불빛이 사그라들고 마음에 그늘이 지는 순간이 있다. 모두의 인생에는 골짜기와 봉우리가 있다. 그 깊이와 너비, 높이가 각각 다를 뿐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굴곡이 주어진다.
인생을 통째로 바꾸고 싶은 누군가가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내가 선망하는 누군가의 부러운 일부만 갖고 싶은 것이지 나 자신을 완전히 그와 바꾸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시인은 마흔 즈음에 윗 시를 썼다. 갑자기 찾아와 내 앞에 선 나의 운명을 만났을 때 그저 가만히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마음에 남는다.
어떻게 살면 내게 찾아온 내 운명을 말없이 안아 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