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긴 시간을 아끼는 사람들이 옛 원형극장 인근 마을 사람들보다 옷을 잘 입긴 했다. 돈을 더 많이 벌었기 때문에 더 많이 쓸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무언가 못마땅한 기색이나 피곤함, 또는 불만이 진득하게 배어 있었다. 눈빛에는 상냥한 기미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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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간을 아끼는 사이에 실제로는 전혀 다른 것을 아끼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아무도 자신의 삶이 점점 빈곤해지고, 획일화되고, 차가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사람들은 이제 아이들을 위해서도 시간을 낼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시간은 삶이며, 삶은 가슴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시간을 아끼면 아낄수록 가진 것이 점점 줄어들었다.
- 미하엘 엔데, <모모>, 한미희 옮김, 비룡소, 2006, 95-98쪽 중에서
<모모>는 청소년 권장도서로 널리 알려졌지만쉬운 책은 아니다. 남보다 잘 살며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 바쁘게 일하는 시간 말고는 다 저축해 된다는 말로 사람들의 시간을 훔치는 회색신사 무리가 있다. 그들은 사람들의 여유 시간을 뺏고 정서를 잃고 그저 돈과 일의 노예로 만들려 한다. 마을 사람들은 서서히 자기 자신마저 잃어간다. 자기의 시간을 남에게 베풀며 순수한 마음을 유지한 모모는 회색신사들의 정체를 밝히고 사람들에게 일상과 행복을 찾아주려고 싸움을 계속한다.
직장인의 시간은 일하는 노동일과 일을 하지 않는 휴일로 나뉜다. 양쪽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라 두 개의 삶을 사는 기분이다.
장범준의 노래처럼 '퇴근 시간 전에는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는데 집에만 오면 시간이 너무 빠'르고, '평일 일과 중에는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가는데 주말만 되면 시간이 너무 빨라' 화가 난다.
티브이 뉴스에서 화제의 인물 인터뷰이로 출연한 과학자는 '주말은 평일보다 왜 시간이 빨리 가는가'라는 질문에 '주말이 평일보다 삼일 더 적어서 그렇다'라고 과학적으로 답했다.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덩치가 크거나 작거나 인성이 좋거나 나쁘거나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시간'일 것이다. 사람마다 수명이 다르므로 일생의 총시간은 같지 않다. 똑같이 주어지는 것은 매일 세팅되는 그날 치의 하루 24시간이다.
단지 살아있다는 이유로 공짜로 주어지는 하루 24시간 한 주 168시간을 어떻게 써야 한다는 주장들은 많다. 촘촘하게 하루를 구획하여 허투루 쓰는 시간이 없도록 하는 법, 아직 세상이 잠든 새벽 시간대에 일어나 자기 계발을 하는 미라클 모닝, 아무리 힘들고 바빠도 자기 전에는 하루를 돌아보고 피드백을 하며 내일을 준비하라는 조언 등이다.
자기 계발서에 나오는 시간관리의 기법들은 훌륭한 방법들이니 각자의 단기 목표나 상황에 따라 차용해서 써 보기엔 좋다.
기성세대는 다가올 미래를 위해 현재를 담보로 열심히 일하고 인내하는 것을 성실한 인간의 태도라 여겼다. 서른에 결혼하기 위해, 마흔에 집을 사기 위해, 오십에 행복하고 여유롭기 위해 현재는 간과되기 일쑤였다. 한 세대만에 사람들의 가치관이 크게 바뀌었다. 나는 이런 변화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미래를 준비하지 않고 현재를 즐기기만 하라는 말이 아니라 미래만큼 현재도 중요하고 미래보다는 현재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매일매일이 즐거우면 즐거운 인생이다. 마흔에는 부자가 될 건데 스물다섯 살인 지금이 괴롭고 힘겹기만 하다면 그런 생은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직장인이 매일 미치도록 바쁜 것은 아니다. 그러면 직장을 10년 20년씩 다니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회사를 다니다 보면 일이 토네이도처럼 몰아쳐 하루종일 정신없고도 모자라 연장근무까지 하는 시즌도 있고 반대로 출근해서도 할 일이 없어서 '야, 이렇게 일 안 하고 월급을 받아도 되나' 하면서 슬슬 웃음이 나는 시기도 있다.
두 상황 다 괜찮고 그렇기 때문에 발란스가 맞는다. 가게를 해도 마찬가지다. 러시 타임에는 화장실도 참으며 손님을 쳐내는데 폭풍이 지나고 나면 휴대폰만 들여다 보고 밖에 무슨 일이 난 건 아닌가 내다보기도 한다. 매시간 그렇게 손님을 쳐댄다면 금방 건물주가 될 텐데 그렇지 않다.
통근시간이 길면 평일은 어쩔 수 없이 '회사 가기' 하나밖에는 할 수가 없다. 더 욕심 내지 않는다. 집에 와서는 그날그날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냥 자고 싶으면 자고 OTT를 보고 싶으면 보고 친구들과 톡만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다가 잔다.
그래도 그 평일은 '회사 갔다 오기'라는 엄청난 미션을 이미 클리어한 날이니 참 잘했다. 주말이나 휴가를 더 알뜰하게 쓰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회사에서 집이 가까우면 평일 저녁시간을 쓸 수 있다. 그래서 비싼 주거비를 지불하며 회사 근처에 사는 사람이 점점 는다. 출퇴근에 드는 시간과 노력을 돈으로 사는 셈이다.
평일 저녁 시간을 쓸 수 있다면 운동을 하거나 동호회 활동을 하거나 친구를 만날 수도 있다. 지하철에 몸을 싣고 멀고 먼 집으로 가는 대신 월급에서 살을 떼어주고 소중한 평일 저녁 스페어 타임을 얻으면 낭비하기가 더 아깝다.
회사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근육이 붙어 주말에 휴식 외에 시간을 낼 수 있다면 반드시 자기 계발을 위한 시간을 확보한다. 직장인으로서 오래 버티고 승진하거나 더 좋은 곳으로 이직을 하고 싶다면 안주하면 안 된다. 회사에서 내가 맡은 직무에 관해서는 전문가가 되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데이터와 AI, ESG가 전 세계적 트렌드라면 그 키워드가 우리 회사, 나의 업무와 어떤 관련을 가지는지 시간을 투자해 공부해야 한다. 쉽게 말해 내가 다시 회사 면접을 본다고 생각하고 트렌드를 분석하고 내 직무와 어떤 질문과 답이 오갈지를 정리하면 된다.
실제 업무 영역을 빼면 한 회사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재직자가 아니라 지원자일 것이다. 처음 입사하고 싶을 때의 마음가짐을 가끔 다시 호출하면 회사 생활이 새롭다.
회사에 주인의식을 가질 것까지는 없지만 내 일에 주인의식을 가지면 다른 데 좋은 게 아니라 나에게 좋다.
나는 지금 선배들과 사수로부터 일을 배우면서 월급도 받는 행운을 누리는 중임을 명심하자.
점심을 주로 구내식당에서 먹는대도 가끔은 훌쩍 나가서 먹고 오는 것처럼 근무일이나 휴일에도 기본적인 루틴 속에 꼭 해야 할 것을 하되 가끔은 하고 싶은 것을 하자.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으면 아무것도 하지 말자.
일을 하는 나에게는 그런 날조차 반드시 필요하다.
*현직자의 말
4년 차 게임회사 개발자 - 추가근무가 많아 월급은 세지만 이제 돈도 싫고 칼퇴 좀 했으면 좋겠다. 돈보다 내 시간을 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