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집은 어디라고?
동네마다 대장아파트가 있다. 자타공인도 있지만 남들은 갸우뚱하는데 자기들이 대장이라 자부하는 곳도 있다. 그러나 대장이 있으면 졸병도 있는 법이다.
우리 아파트는 스물다섯 살 구축 초소형단지라 우리 동네에서는 졸병 1 쯤 되는 포지션이다. 졸병들 중에 그나마 1이라 할 것은 1군 건설사 브랜드가 있고 위치가 좋아서이다.
아침저녁 하루 두 번 산책하는 군밤이의 취미는 '아파트 임장'이다.
오래되고 좁아서 별 볼 것 없는 우리 단지를 나서는 군밤이의 발걸음은 무척 가볍다.
군밤이가 제일 먼저 향하는 곳은 우리 정문 바로 맞은편에 새로 입주한 초신축 H다. 거기에 무슨 좋은 냄새가 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지만 일단 그 아파트만 바라보고 직진한다.
산책로가 잘 정비된 H에는 온 동네 개들이 모인다. 나는 굳이 들어가기 싫은데 개는 고집스럽게 가려고 한다. 나와 비슷한 처지로 보이는 동네 견주들이 남의 단지 안에서 어정쩡하니 줄 끝을 잡고 있다.
H에 살든 살지 않든, 개들은 H의 깨끗한 풀숲과 길가에 오줌을 마구 눈다. 그 아파트 견주인지 동네 견주인지 개똥을 안 치우고 가는 무례한 사람도 당연히 있다.
그러니 이 꼴이 영 보기 싫은 신축 주민을 생각하면 미안하다.
새 아파트는 좋다. 보도블록도 파스텔톤이고 놀이터도 예쁘고 스쿨버스 존에는 엄마들을 위한 하얀 의자도 있고 동과 동 사이를 연결하는 조경도 아름답다. 요즘은 신축이라도 제법 굵고 높은 나무들을 많이 심고 작은 숲까지 조성해 놓아서, 키가 작고 마른나무들이 듬성듬성 있는 황량한 분위기가 아니다.
다행히 암컷인 군밤이는 길에다 마킹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래도 외부인인 나는 깔끔한 신축을 더럽힐까 봐 눈치껏 다닌다.
군밤이가 킁킁거리더니 똥을 눴다. 그런데 하필 그 옆에 유기된 개똥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의심할까 봐 나는 군밤이 것과 함께 먼저 있던 것까지 치우고 우리 아파트보다 스무 배 깨끗한 바닥을 물티슈로 닦았다.
- 이 놈아, 여기는 우리보다 두 배 비싸.
저녁 산책을 다녀온 내가 군밤이 덕에 새 아파트를 구경한다 하니, 아침 산책 담당인 남편은 매일 같은 시간에 H의 경비원과 인사도 한단다.
군밤이가 다음으로 가는 곳은 우리 아파트와 비슷한 연식이지만 중형 단지이고 우리나라 최고의 브랜드를 달고 있으면서 최근에 현대판 영어이름으로 개명한 R 아파트다.
R은 좀 얄미운 구석이 있다. 인근에 1기 신도시가 생긴 후에 그 신도시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가 몇 년 전부터 트리플 역세권이 된다는 역명이 인구에 회자하자 냉큼 그 이름을 넣어 개명을 했다.
1기 신도시명를 뺀 자리에 gtx 역명을 넣고 한글을 영어로 바꿔 개명했을 뿐인데 아파트 거래가가 몇 천 올랐다.
어느 웨딩홀이 리모델링을 하면서 '과거는 잊어라, 모든 것이 새롭다'라는 캐치플레이즈를 걸었었는데 나는 '새 출발 하는 신혼부부가 내심 하고 싶은 말까지 품은 중의법'에 감명을 받았었다.
R을 보면 그 웨딩홀이 떠오른다.
군밤이는 R 안에서 좀 돌아보지만 H 같은 퍼포먼스를 느끼지는 못 한다.
R은 그냥 우리 아파트를 세 번 정도 복붙 해서 만든 것뿐이다.
군밤이는 바로 인접한 M 아파트를 흘낏 바라보지만 들어가지 않는다. 군밤이도 M이 졸병 3이라는 것을 아는 것 같다.
군밤이는 우리 아파트보다 볼 것이 많은 데만 좋아한다.
평생을 보호소에서 살던 아이라서 인간들의 아파트가 뿜는 기운에 투명한 걸까. 군밤이에게는 본능적으로 대장부터 졸병까지의 서열이 곧이곧대로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15분이 지났다. 이제 산책시간의 반이 지나갔다.
M을 패싱하고 직진하면 우리 아파트와 같은 브랜드인데 우리보다 나중에 지어 2차라고 구별한 곳이 나온다. 포지션은 R보다 높다. 이 단지는 초신축 H와 왕복 2차선의 작은 도로를 두고 마주 서 있다. H가 건축을 하는 동안 가장 많은 항의 현수막을 걸기도 했다.
이쪽 방향으로 뭐뭐를 놓지 마라, 조망권과 일조권을 보장하라, 이 길만 길이냐! 대형공사차량 우회하라, 등등.
지금은 그 단지 주민들이 H를 가로질러 다닌다. 비좁았던 2차의 후문 주변도 H의 기부채납으로 깔끔히 정비가 됐다. 신축이 들어오면서는 점멸 신호등과 시시티브이도 여기저기 달렸다.
동네가 좋아진 거다.
재건축을 한 H는 원래 이 동네의 첫 아파트였다. 그러다가 20년쯤 전에는 R, 2차, 그리고 더 전에는 1차인 우리가 제각각 아파트를 짓느라 주변에 고통을 줬을 것이다. 거의 고맘때인 건축연도를 감안하면 이 동네 안에서만 한 해에도 몇 군데에서 동시에 아파트 공사를 했다.
그땐 지금 신축 H의 원주민들이 플래카드를 내 걸었었겠지.
H를 짓는 동안 이웃들은 아파트 건축 공사, 도로와 지하설비 등 각종 관련 공사로 적잖은 불편을 감내해야 했다. 그리고 수년간 견딘 대가로 보다 살기 좋은 동네를 얻은 셈이다.
30분의 산책을 마치고 집으로 왔다.
하긴 여기는 아파트밖에 없으니 어디로 가든지 '또 다른 아파트'가 나오기는 한다.
개는 그저 향기로운 길을 찾아다녔을 뿐인데 사람의 시각으로 판단하고는 임장을 좋아하는 개라고 매도해서 억울하겠다.
사과할게, 니가 실거래가라든지 얼죽신 같은 말을 알겠니.
군밤이가 좋아하고 깨끗하고 아기자기한 H에 살면 좋겠다.
그러나 우리가 H에 산들, 개가 그 안에서만 돌고 만족하겠나. 그때는 어쩌면 맞은편 졸병 1에 부득부득 가 보자고 끌 지도 모르지 않나.
원래 갖지 못하는 것이 갖고 싶고 안 가본 길이 궁금한 법이다. 돈 덜 드는 졸병 1로 살면서 공동 인프라는 대장과 똑같이 누리는 게 가성비 아니겠나.
나는 이렇게 정신승리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