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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명선 Dec 09. 2022

손흥민과 썸 타기

자, 이제 나만 잘하면 돼

 2022 카타르 월드컵은 아직 진행중지만 우리나라 월드컵 대표선수단은 16강전을 끝으로 귀국하였다. 카타르 월드컵 대회 자체가 품고 있는 정치적, 윤리적 문제 등은 차치하고 우리나라 축구 대표 선수들과 축구 팬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한다.


 내가 어릴 때 티브이에서 서독(독일도 아닌 서독이다) 프로축구 중계를 했다. 화면 가득 눈이 아프도록 파란 잔디 구장이 있고 선수들은 자유롭게 뛰고 있었다.

 마치 꿈속 같았다. 그때 우리나라 축구 선수들은 우리 국민학교 운동장 같이 붉은 모래가 깔려 달릴 때마다 흙먼지가 이는 구장에서 경기를 했다.

 그러면서도 국가와 국민은 그들에게 바라는 것이 참 많았다. 헝그리 정신 하나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위압이 지배하던 때였고 어차피 국민들도 모두 각자의 모래 운동장에서 각자의 하루를 살아내던 때였다.


 월드컵이나 A매치 경기들이 새벽에 할 때면 지금처럼 잠을 안 자고 버티거나 일찍 자고 일어난 가족들이 거실에 모여 중계를 보았다. 아버지는 텔레비전 안으로 들어갈 기세로 초집중을 하며 누구보다 시끄럽게 리액션을 했는데 우리나라 선수가 패스를 잘못하거나 슛을 부정확하게 날리면 '저런 개발질!'이라고 소리쳤다. 조용히 좀 하라고 핀잔을 주면 그때만 잠잠했을 뿐 마찬가지였다.

 정부와 언론도 경기 내용과 상관없이 이기면 잘 싸웠다고 화환을 걸어주며 환영하고, 지면 욕받이였다. 내 기억으로 해외 경기에서 지고 돌아오는 대표팀이 아무도 몰래 귀국하기도 했다.


    


    

 

 이번 월드컵에서 조별 리그 세 경기와 16강전 한 경기를 보며 나는 우리나라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구나를 느꼈다. 경기에 패했다고 해서 기가 죽거나 눈치 보지 않는 선수들도 멋있었고 게임 스코어보다는 많은 인원이 각자의 분야에서 노력한 과정, 선수들과 코치진이 경기를 운영하는 과정 자체를 평가하는 팬들은 더욱 멋있었다.  

 경기에 져도 '잘했다, 고맙다, 다음에 더 잘하면 된다'라는 말을 하는 세상이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개인적 생각으로 7,80년대생들이 사회의 주축인 4,50대가 된 영향도 크다고 본다. 7,80년대생들은 그들이 10대, 20대일 때 한국 사회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키는 젊은이들이었다. 지금의 소위 Z세대만큼이나, 기성세대들이 짜 놓은 단단한 모양 틀에 맞지 않는 개인들이었다.

 윗세대 중에 말랑한 실리콘 틀을 가진 유연한 분들이 함께 우리를 키워 주었고 이제는 우리가 한국의 기성세대가 되어 얌체공 같이 통통 튀는 젊은이들을 품어주고 있다.


 내가 첫 대학입시에 실패해서 재수를 생각할 때 할머니는 '여자애를 무슨 재수까지 시키냐. 남동생이 둘인데 취업을 해서 장녀 역할을 해야지'라는 말을 했지만 어머니가 시어머니의 말을 무시하고 재수 학원도 등록해 주고 대학도 보내 주었다.

 청소년 때까지 학교와 사회에서는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다'는 가스라이팅을 계속했지만 대학에서는 교수님과 선배들이 그것이 오랫동안 의도적으로 조장된 울타리임을 깨닫게 해 주었다.    

 

 가끔, 내가 20대였던 1990년대와 내 딸들이 20대인 2020년대를 나란히 놓고 보면, 한 세대 사이에 이뤄지고 있는 놀라운 변화가 기적 같기도 하다.

 

 이제 50대 기성세대가 된 나만 잘하면 되겠다.  

 





 오늘 새벽꿈이었다. 20대인 내가 동창회에 갔는데 손흥민이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생인 손흥민과 밥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꿈은 원래 전지적 시점에서 모든 상황을 저절로 알게 되는데 그건 분명 '썸'이었다.

 

 아침에 스물두 살 작은딸에게 '엄마가 20대였는데 손흥민이랑 썸 타는 꿈 꿨다'라 했더니 매우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아빠가 장원영이랑 썸 타는 꿈 꿨다는 것만큼 어이가 없다'라고 했다.

 나는 빽 소리를 질러 반박했다.

 "그게 같니? 장원영은 10대잖아!"

 "오모모, 그걸 아시네"

 

 딸의 비웃음으로 시작하는 하루지만, 참 살수록 즐거운 세상이다.

 

 부끄럽지 않은 기성세대로 잘 살아봐야겠다.    

 

 


남은 2022년도 다같이 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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